[기자수첩] 대법원장 한마디에… 190쪽 조사결과가 뒤집혔다

조백건 사회부 기자
입력 2018.05.30 03:01

블랙리스트 특별조사단 지난주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 판사들, 형사 책임 물을정도 아니다" 결론
대법원장 "고발도 고려" 발언후 특조단장 "고발 가능" 입장 선회

조백건 사회부 기자

대법원 산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은 지난 25일 밤 10시 20분쯤 조사 보고서를 법원 온라인 게시판에 올렸다. 법원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려고 '판사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는지와 권한을 남용했는지를 조사한 결과였다.

A4용지 187쪽짜리 보고서 내용은 과거 1·2차 조사 때와 비슷했다. 블랙리스트는 없었고, 행정처의 권한 남용은 있었지만 형사 책임을 물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작년 3월부터 1년 2개월간 법원을 내홍(內訌)에 빠트린 이 사태가 이 3차 조사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김명수 대법원장은 월요일인 28일 출근길에 "(행정처 권한 남용) 관련자들을 고발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런 부분까지 모두 고려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검찰에 고발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둔 것이다. 그러자 특별조사단 관계자들은 이날 오후 기자들을 불러 "그 부분(형사 고발)은 충분한 검토 여지가 있다"고 했다. 3일 만에 태도를 바꾼 것이다.

지금도 보고서엔 '특별조사단에서는 (관련자들에게) 형사 책임을 묻기에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는 의견이 일치되었음'(59쪽) '뚜렷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형사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함'(185쪽)이라는 구절이 있다. 행정처 권한 남용이 형사 고발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명시한 것이다. 그래 놓고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는지 설명조차 없다.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행정처에서 만든 문건을 보면 권한 남용이라고 볼 수 있는 내용이 없지 않다. 행정처는 양 전 대법원장 역점 사업이던 상고법원 설치에 반대하는 일부 판사의 성향을 파악한 문건을 만들었다.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부에 '유리하게' 내려진 판결을 활용해 청와대를 설득하는 방안을 검토한 문건도 있다. 2016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 선거 때 특정 후보를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한 문건도 발견됐다. 그것만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문건을 만든 전·현직 판사들에 대해 그런 비판을 하는 것과 형사책임을 묻는다는 건 다른 문제다. 죄가 성립하려면 엄격한 요건이 있어야 한다.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는 대표적 혐의는 직권 남용이다. 행정처가 일선 판사에게 재판과 관련한 압력을 넣었거나, 특정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면 죄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한 행위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행정처 문건은 대부분 검토로 끝났고 실행되지 않았다. 일부 실행된 것은 관련 예규 등 근거가 있었다. 특별조사단이 만장일치로 고발하기엔 충분치 않다고 결론 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특별조사단은 김 대법원장이 지난 2월 만든 것이다. 그가 대법관으로 추천한 안철상 행정처장을 단장으로 앉혔다. 조사단원 6명 중 절반을 자신이 회장을 지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로 채웠다. "고발을 검토하겠다"는 김 대법원장의 입장은 결국 자신이 믿고 맡긴 사람들이 내린 결론도 못 믿겠다는 것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특별조사단의 행태다. 형사 고발 하지 않는다고 해놓고 대법원장 한마디에 곧바로 '고발 가능'으로 태도를 바꿨다. 조사단엔 대법관, 법원장, 고법부장 등이 있다. 20년 넘게 재판을 했다는 최고위 법관들의 행태가 이렇다. 조사단은 보고서 결어(結語)에서 '이번 사태 배경은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한 사법부가 수직적 의사 결정 구조에 안주해 관료제적 경향을 심화시킨 점에 있다'고 했다. 대법원장 말 한마디에 조사 결과를 180도 뒤집는 특별조사단 행태는 이와 얼마나 다른가. 이런 식이라면 국민으로선 '일선 재판도 이렇게 진행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A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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