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쇼도 경기장도… 핑크가 남자를 완성한다

최보윤 기자
입력 2018.05.17 03:00

'여성스럽다' 관념 깨는 핑크 유행
18세기엔 상류층 권력의 표상… 최근 '성차별 반대' 의미로 확산
스포츠 스타 우즈·페더러도 입어

핑크는 남자의 색깔이다. 패션에 관심 있다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전통적 관념에 도전하며 쉽게 따라 하기 힘든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이 곧 패션이기 때문이다. 요즘 핑크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패션뿐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핑크는 패션쇼 남성복 무대는 물론 테스토스테론으로 후끈 달아오른 스포츠 경기장까지 점령했다. 영화 '킹스맨' 대사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핑크가 남자를 만든다'.

지난 1월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경기장은 핑크 물결이었다.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에서부터 닉 키리오스, 그리고르 디미트로프 같은 선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양한 채도의 핑크 패션으로 새파란 코트를 물들였다. 초록색 잔디에도 핑크 바람은 계속됐다. 지난 4월 미국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자 패트릭 리드와 로이 매킬로이, 최근 웰스파고 챔피언십에 나선 타이거 우즈도 핑크색 옷을 선보였다.

남자들이 가장 꺼릴 것 같은 핑크가 최근 인종, 나이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가장 주목받는 색상으로 뜨고 있다. 타이거 우즈 같은 스포츠 스타 경기복에서 부터 각종 캐주얼, 정장에 이르기까지 핑크가 점령하고 있다. /랄프로렌·브룩스브라더스·리스(REISS)·랩코리아·톰포드·게티이미지코리아
이들의 스폰서인 나이키는 경기장에 가장 어울리는 색상을 골랐다고 밝혔다. 나이키는 호주오픈 의상을 내놓으면서 "무엇보다 공격적으로 보이기 위해"라고 설명했다. 핑크색이 공격적이라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서 '미스터 핑크'를 맡은 스티브 부세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핑크야? 계집애 같잖아."

하지만 색상의 역사를 보면 나이키가 말한 공격성을 이해할 수 있다. 미국 뉴욕의 패션기술대학(FIT) 발레리 스틸 박물관장은 최근 CNN 인터뷰에서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핑크는 남녀 상관없이 상류층이 향유한 권력의 표상이었다"면서 "핑크는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빨간색이 낳은 진취적 색상"이라고 말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개츠비의 핑크색 슈트는 꿈과 야망을 은유한다. 최근 핑크색은 성 역할 구분이나 성차별 반대를 지지하는 행위로도 읽힌다. 호주 패션 전문가 크리스티 클레멘츠는 "'남자에게 핑크를' 같은 구호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핑크는 최신 이슈인 '성별 불특정 흐름'에 매우 적합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형광빛 도는 핑크를 잘못 입으면 구멍가게 왕사탕이나 싸구려 인조 보석 반지 같아 보일 수 있다. 호주오픈 당시에도 일부 선수의 의상을 두고 '젤리 같다'는 반응이 있었다. 특히 노란 색조의 동양인 피부에는 자칫 촌스러워 보일 수 있다.

여름 시즌을 맞아 태닝이 잘 된 피부라면 핫핑크나 파스텔톤 모두 건강미를 돋보이게 한다. 대체로는 옅은 분홍색을 선택하는 것이 무난하다. 패션디자이너 홍혜진은 "노란 피부를 혈색 있게 보이려면 주황, 붉은 색감이 밑바탕에 있는 복숭앗빛을 추천한다"면서 "연분홍 피케셔츠나 니트 소재는 다양한 연령대 남성에게 과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브룩스 브라더스나 국내 캐주얼 브랜드 코모도는 분홍 셔츠, 줄무늬 셔츠에 진회색이나 갈색, 감색 정장을 맞춰 내놓고 있다. 이런 옷차림은 정돈된 느낌을 준다. 유백색이 도는 핑크는 한결 고급스러우면서도 얼굴을 환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조선 정조 문신 채제공(蔡濟恭)의 초상화가 좋은 예다. 연분홍 관복에 하늘빛 도는 서대(犀帶·허리에 차는 띠)가 점잖고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이미 우리 조상도 핑크의 매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A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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