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보수단체 '향군'이 남북정상회담 날 文대통령과 악수한 까닭은?[정정내용 있음]

박돈규 기자 김은중 기자
입력 2018.05.05 03:02 수정 2018.05.14 11:15

[Why 잠금해제]

향군회장 '코드 맞추기'?
"대통령이 적장과 담판
국민이 응원하는게 당연 보수·진보가 어디 있느냐

비핵화 회담 반대한다면 다른 수단이 뭐가 있나
70년 냉전 끝낼 이 기회 발목 잡아서는 안돼"

돈줄 때문에 정부에 협조적
산하 10여개 업체 수익사업 국가보훈처 심의 거쳐야
다른 보수단체 자유총연맹 年90억원 보조금 지원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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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단체인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지난달 27일 청와대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 환영하러 나온 재향군인회 회원들. / 연합뉴스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아침에 청와대를 나설 때 TV 시청자들은 눈을 의심했다. '비핵화' '정상회담 성공 기원' 같은 팻말을 든 환송 인파에 재향군인회(이하 향군) 회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예비역 장병들의 모임인 향군은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핵심 아니었나? 그런데 이날은 북핵 문제를 규탄하러 나온 게 아니었다. 보수에게나 진보에게나 낯선 풍경이었다.

향군 홈페이지에는 '1천만 향군은 남북, 미·북 정상회담을 지지한다!'는 구호가 붙어 있다. 보수단체 자유총연맹(회원 350만명)도 지난달 30일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획기적 번영과 민족의 역사적 숙원을 이루기 위한 거대한 발걸음"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언론들은 "보수단체들까지 이번 회담을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

재향군인회에 무슨 일이

1952년 창설된 향군은 국내 최대 안보 단체다. 회비를 낸 정회원만 130만명에 이른다. 향군은 지난 3월 청와대가 남북 정상회담의 4월 개최를 발표한 직후 10개 중앙 일간지에 지지 광고를 내고 "남북 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가 성공하도록 기원한다"고 밝혔다. 청와대 앞에서 열린 문 대통령 환송 집회는 김진호 회장이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향군 관계자는 "각 시·도 회장들이 동의하고 공론화를 거쳐 결정했다. 정상회담 당일 아침 청와대에서 'VIP(문 대통령)가 차에서 내려 향군 회원들과 악수를 할 수도 있다'고 알려왔다"고 전했다. 이날 집회엔 전국 각지에서 온 향군 회원 6000여명이 참석했다.

2017년 8월 당선된 김진호 향군회장은 그동안 오락가락 행보를 보여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학군 출신으로는 최초로 합참의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제1연평해전을 압승으로 이끌었다. 전역 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1~2004년에 한국토지공사 사장으로 남북 경제협력과 개성공단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이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겨 대선에서 이명박(17대)과 박근혜(18대) 전 대통령을 차례로 지지했지만 지난해 대선에선 더불어민주당으로 갈아타 문 대통령을 지지했다.

김 회장은 3일 전화 통화에서 "대통령이 적장(敵將)과 담판하러 가는데 국민이 응원하는 게 당연하지, 보수·진보가 어디 있느냐"며 "보수적인 향군이 왜 진보 정권을 지원하느냐는 식으로 보지 마라. 진보가 아니라 안보를 위해 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향군이 변절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고 하자 "북한을 비핵화로 이끄는 회담 자체를 반대한다면 다른 수단이 뭐가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70년 냉전을 끝낼 이 기회를 지지하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향군은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한 지난해 11월엔 1만3000여명을 모아 환영 행사를 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와 '코드 맞추기'라는 지적에 대해 황동규 향군 홍보실장은 "국군 통수권자가 대통령이기 때문에 군인은 충성을 다하는 게 본분"이라며 "한반도의 염원인 비핵화를 응원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당연한 책무"라고 말했다. 그는 "무조건적 지지가 아니라 협상 과정이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향군의 이번 행보에 대해 우파 한쪽에서는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다. 향군 산하 여러 지역 조직들은 그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 구명과 대북 규탄 등을 주제로 태극기 집회에 활발하게 참여해 왔다. 지난달부터 통합 태극기 집회를 이끌고 있는 자유대연합 관계자는 "향군 지도부가 회원들의 여론을 수렴하지 못하고 어용 단체로 전락하고 있다"며 "향군 내부에서도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보수 배신인가, 돈에 굴복인가

한 예비역 육군 장군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서해 평화수역, 대북 확성기 등을 너무 쉽게 넘겨줬다"며 "요즘 전방 사단 지휘관들은 대북 정책에 대해 '이건 아니지 않으냐'가 대체적인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향군은 과거에도 정도 차이만 있었을 뿐 정부에 협조적이었다"며 "재정적 지원을 받으려면 마지못해 따라가야 할 때도 있다"고 했다. 보수의 배신처럼 보이겠지만 '문제는 돈'이라는 것이다.

향군은 산하에 10여개 업체를 두고 고속도로 휴게소와 향군타워 운영, 관광업 등 각종 수익사업을 하고 있다. 수입은 연간 4000억원 규모. 재향군인회법에 따라 수익 사업은 국가보훈처 심의를 거친다. 한성주 예비역 공군 소장은 "관변 단체 입장에서 정부 기조에 배치되는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다"고 했다.

반공 단체로 출발한 자유총연맹도 정부와 전국 지자체로부터 연간 70억~90억원의 보조금을 지원받고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역대 정권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자유총연맹 총재 선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친박(親朴)계인 김경재 전 총재는 2016년 11월 태극기 집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도 삼성그룹으로부터 8000억원을 받았다"고 말했다가 지난해 6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그가 임기를 1년 남기고 사퇴하자 지난달 13일 박종환 전 충북지방경찰청장이 새 총재로 취임했다. 경희대 법대 72학번으로 문 대통령과 친구 사이로 알려져 있다.

적폐로 몰린 보수 단체들은 사법 당국의 조사를 받거나 회원 참여율이 떨어지면서 고사(枯死) 위기다. 전삼현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은 "큰 이슈가 터질 때 거리에 나가 찬반에 앞장서는 이른바 '아스팔트 단체들'은 시류에 휩쓸리곤 한다"면서도 "향군과 자유총연맹의 입장 수정은 일종의 변절이라서 놀랍다"고 말했다. 현진권 전 자유경제원장은 "관변 단체들은 돈줄을 쥔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좌파가 정권을 잡으면 자기 색채를 뿌리내리려는 시도가 더 공격적으로 펼쳐진다. 이것이야말로 '내로남불'"이라고 했다.

♣ 바로잡습니다
▲지난 5일 B5면 '보수 단체 '향군'이 남북 정상회담 날 文 대통령과 악수한 까닭은?' 기사에서 "김진호 재향군인회장이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겨 대선에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을 차례로 지지했다"는 내용은, 김 회장이 두 대통령을 지지한 건 사실이지만 당적을 옮긴 건 아니기에 바로잡습니다.
조선일보 B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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