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내 안의 교복학생 떠나보내니… '벤처 자선' 아이디어 샘솟아

최보윤 기자
입력 2018.03.23 04:00

벤처자선회사 'C프로그램' 대표 엄윤미

벤처 자선이란
기부금만 주는게 아니라 벤처 투자처럼 진행상황 점검하면서 지원 더하고 인력 투입

1세대 벤처 5인방이 설립
엄마가 되고 나니 세상보는 눈 달라져 잘나가던 회사 박차고 새로운 도전 나서

“무슨 일 하느냐 물을 때마다 곤란해요. 제가 하는 일을 설명하는 게 제일 어렵거든요.” 대학로 옛 샘터 사옥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공일호’ 건물에서 만난 엄윤미 C프로그램 대표가 환하게 웃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을 찾아내 지원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역할이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대학로 문화 발상지였던 옛 샘터 건물이 최근 '공공일호'란 이름을 달고 공공 가치를 위한 교육·미디어 실험장으로 변신했다. 이 건물 3층 '러닝랩'은 공공일호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온더레코드 라이브러리'라 이름 붙은 공간엔 교육, 메이커 운동, 과학 등과 관련된 책이 옹기종기 서가를 장식한 가운데 여럿이 함께 쓰는 '커뮤니티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다. 라이브러리 옆방, '놀다 보니 슈퍼맨 웃다 보니 어벤져스'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대안 교육 실험터인 '거꾸로 학교 혜화 캠퍼스'에서 고등학생들이 깔깔 웃으며 수업 중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실험이 꽃피는 이 러닝랩은 벤처 자선 회사 'C프로그램'이 운영하는 곳이다.

생소한 회사라면 이런 이름은 어떨까. 어린이 메이커 교육의 산실로 꼽히는 '이문238', 디자이너 안상수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 서울 금호동의 어린이를 위한 동네 미술관 '헬로우 뮤지움', 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인기 프로그램인 '공룡 발밑 하룻밤', 성수동 공유 사무실 '카우앤독'…. 근래 문화계에서 조용히 화제가 된 이 프로젝트들을 잇는 고리, 바로 C프로그램이 투자한 곳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익숙지 않다면 이들은 어떨까.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정주 NXC 회장,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이재웅 다음 창업자,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등 '한국 벤처 1세대' 5인방이 의기투합해 2014년 국내 최초로 '벤처 자선(venture philanthropy)회사'라는 개념을 선보이며 만든 회사가 C프로그램이다. 그 5인방이 선택한 인물, C프로그램의 엄윤미(42) 대표를 friday가 만났다.

―어떻게 C프로그램을 맡게 됐는가.

"컨설팅 회사(맥킨지)를 다니다 글로벌 헤드헌팅 회사(이곤젠더)에 몸담으면서 리더십에 관심은 많았다. 우연히 다음 부사장이었던 문효은 이화여대 리더십센터 교수와 청소년에게 혁신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는 장영화 변호사와 만나 2013년 여성 기업가 네트워크를 만들게 됐다. 여기서 여성 창업자, IT업계 여성들을 만났다. 이후 예전과 다른 시선과 행동 방식, 선택을 보게 됐다. 그 덕분에 C프로그램을 이끌게 된 것 같다."

―무엇이 다르던가.

"조직에 몸담으면서 후배나 동료들 고민 상담을 하게 되면 점점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하지만 여성 기업가 네트워크 참여자들은 선택안을 스스로 만들어가더라. 그 전엔 계획을 세워 정답을 추구했다면 이쪽에선 '일단 해볼까?' '우선 작게라도 시작할까?' 식으로 일했다. 처음엔 그게 될까 싶어 굉장히 불안했는데, 그게 되더라. 굉장히 신선했다."

―유명 벤처 5인방이 뒤에 있다 해도 잘나가던 회사를 박차고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김범수 의장 등) 이사 5명을 만났을 때 '왜 이런 걸 만들게 됐느냐'며 외려 질문을 던지는 편이었다. 연봉은 차이가 좀 있지만(웃음) 하기로 결정한 뒤로는 큰 고민은 안 했다. 비영리 기관에서 일하자는 열망은 항상 있었다. 맥킨지에서도 '프로보노'(공공 이익을 위한 무료 봉사) 활동을 꾸준히 했고, 재능 기부라는 용어가 낯설 때인 2000년대 초반에 공정 무역과 나눔에 대한 책을 번역해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열 살 딸 아이를 키우면서 워킹맘으로 일을 대하는 자세가 이전과는 좀 달라졌다. 나에게 온전히 시간을 쓰던 대상이 아이로 바뀌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 듯하다."

C프로그램이 지원하는 서울 이문동의 ‘이문 238’. 어른 간섭 없이 아이들이 자유롭게 물건을 만드는 어린이 작업실이다./이문 238
―벤처 자선이란 개념 역시 새롭다.

"이베이 창업자인 피에르 오미디아가 설립한 '오미디아 네트워크' 등 해외의 여러 벤처 자선 단체와 대화하면서 참조해갔다. '자선'이지만 단순히 기부금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벤처 투자와 같이 다양한 측정 지표와 기준을 가지고 진행 상황을 점검하면서 지원을 추가하거나 인력을 투입한다. 공공성을 지키면서 지속성을 유지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지원한 단체가 좀 더 안전하면서 마음 놓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틀을 만들어준다. 분기별로 이사들과 함께 이사회를 열어 각종 진행 상황 등을 점검한다."

―자선에 투자한다?

"우리는 실험에 투자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실험실을 제공하는 회사다. 'creativity(창의성)'란 단어를 주목해 논의하다 '놀이(play)'라는 주제를 끌어내게 됐다. 놀이는 또 학습과 관련됐다. 'Play fund'에서는 아이들의 놀이 환경이 달라질 수 있도록 일상 반경 안의 (동네) 공간과 연구에 투자하고, 'Learning fund'에서는 선생님들이 시도하는 실험에, 그리고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대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투자한다. 지금껏 프로젝트 35가지 정도에 투자했다."

―파트너사의 어떤 점을 주목하나.

"근본적으로 '왜 안 돼?'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분들이다. 아이들이 뛰면서나 누워서도 즐길 수 있는 헬로우 뮤지움이나 아이들에게 도구와 공간을 무료로 제공해 즐길 수 있게 하는 이문 238, 선생님이 주로 이야기하는 대신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가르치게 하는 일종의 '스튜처(student+teacher)'를 표방하는 거꾸로 학교 등 모두 종전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다. 5년간 55억원을 투입하기로 한 '내셔널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는 아시아 탐험가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이다. 비영리 과학·교육기관으로 이곳을 통해 제인 구달 등이 지원을 받았지만 아시아 탐험가는 100여 년간 손에 꼽힐 만하다. 2015년 투자 이후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장이권 교수, 히말라야 로체 남벽을 원정한 홍성택 대장 등 거의 100명에 가까운 이를 지원하고 있다."

―도전, 창의, 변화 등은 누구나 말하기는 쉬워도 측정이나 계량이 어려운 주제다.

"결과지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선택 방안을 확장해가는 일을 하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느 순간 내 안에 교복 입은 학생이 있어서 '이 일은 몇 점짜리일까' '칭찬받을 수 있을까'라며 스스로를 붙잡고 있다고 느꼈다. 내 안의 교복 학생을 떠나보내고 마음껏 백지에 쏟아낼 때, 그때가 창의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걸고 사회를 바꿔가는 이들이 주변에 분명히 있다. 그들로부터 변화는 시작한다. 이미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엄윤미 대표 프로필

1976 서울 출생
2000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2005 INSEAD MBA
2006~ 2011 맥킨지 서울사무소
2011~ 2014 이곤젠더 인터내셔널 서울사무소 부사장
2014~ C프로그램 대표
조선일보 C5면
헬스조선 상례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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