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조선 8대 명당인 '말명당'에 사위·딸도 함께 묻힌 까닭은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입력 2018.03.10 03:02

[김두규의 國運風水]

지난 2월 설날 아침의 일이다.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말했다. "만약 훗날 너희들이 명절과 제사를 계속 지낸다면 3남매가 돌아가면서 지내도록 하렴!" 그런데 딸아이가 이의를 제기했다. "왜, 오빠들이 안 하고? 엄마도 외갓집 차례 안 지내고 외할아버지 제사도 안 모시면서." 할 말이 없었다. 우리 고모들과 누나들도 친정 제사·차례를 주관하지 않는다. 또 막내 사위인 필자가 장인 제사를 모시겠다고 한다면 큰처남들이 자신들을 무시한다며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딸아이를 납득시킬 생각이다.

필자의 거주지 근처에 '조선 8대 명당' 가운데 하나가 있다.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 '말명당'이다. 수년 전 순창군청에서 문중 요청으로 전북도청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풍수설을 근거로 문화재 지정은 어렵다'는 이유로 탈락되었다. 귀중한 문화사적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풍수설을 내세우는 바람에 문화재로서 논의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문화사적 가치인가? 이른바 윤회봉사(輪廻奉祀)와 균분상속(均分相續)의 현장이다.

윤회봉사란 자녀(아들딸)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딸의 경우 제사를 맡다가 죽으면 그 아들, 즉 외손이 제사를 맡는다. "제사란 본질적으로 조상이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집단과 질서를 상념하고 조상과 후손 사이의 은밀하고 낭만적인 만남을 전제한다. 조상과의 관계 단절은 곧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제사는 소중하였다."(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퇴계학)

제사 의례를 치르는 과정은 재산 상속 문제와 맞물리게 된다. 조선시대 재산 상속은 장남·차남·아들·딸 구별 없이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도록[平分] '경국대전'이 규정하고 있었다. 일부 집안이 소장하고 있는 분재기(分財記)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지만, 더러는 특정 문중의 선산 묘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묘역 맨 위에 자리한 박예 부부 무덤. 그 아래로 박예의 딸과 사위 김극뉴의 무덤, 김극뉴의 딸과 그 사위 정광좌의 무덤이 차례대로 있다. 아들딸, 사위와 며느리 차별이 없다./김두규 제공
박예의 딸과 사위 김극뉴의 무덤./김두규 제공
김극뉴의 딸과 그 사위 정광좌의 무덤./김두규 제공
순창 '말명당'의 경우가 그러하다. 맨 위에 함양박씨 박예 부부, 그 아래에 광산김씨 김극뉴(1436~1496)와 부인 박씨(박예의 딸), 묘역의 맨 아래에는 동래정씨 정광좌(1467~1520)와 부인(김극뉴의 딸)의 무덤이 자리한다. 함양박씨·광산김씨·동래정씨가 같은 묘역에 공존하는데 딸들이 매개가 된다. 이후 이들이 배출한 후손들은 조선조 학계와 관계에 큰 족적을 남김에 따라 '조선 8대 명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의 역사적 현장이며, 서로 다른 성씨가 결혼을 매개로 한자리에 공존하는 대동세계의 현장이다.

이러한 본질이 망각되고 이곳 '말명당'에는 이후 잘못된 전설들이 만들어진다. 첫 번째 전설은 '시댁을 위해 친정집 명당을 훔쳤다'는 '딸도둑설'이다. 또 하나는 해방 이후 관인풍수학이 사라지면서 발호하게 된 풍수술사들의 본질 왜곡이다. 일부 술사들은 이곳이 길지가 아니라고 객기를 부린다. '주산·청룡·백호·안산 등의 문제점이 너무 많아 심각한 우환임에도 불구하고 풍수학자들이 이를 외면한다'고 비난함과 동시에 이 땅을 혹평한다. 또 하나는 '이곳이 길지임은 분명하나 우백호가 더 길게 뻗어 있고, 좌청룡이 중간에 함몰되어 장자가 절손하며 외손이 발복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곳 후손들의 족보까지 가져다 억지로 끼워 맞추려 든다. 풍수 주요 고전들에 없는 주장들이며, 당시의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 시집간 딸들도 친정 선영에 묻힐 수 있어야 하고, 선산에 대한 지분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자 보편적 가치에 부합한다.
조선일보 B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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