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정치] '닫힌 사회'로 가는 공론 조사

홍영림 여론조사전문기자
입력 2017.12.06 03:15
홍영림 여론조사전문기자

청와대 국민 청원으로 시작된 '낙태죄 폐지' 논란과 관련해 최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검토하겠다"고 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문제에 이어 낙태죄 존폐도 공론 조사를 통해 정부가 방침을 정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신고리 원전 공론 조사 이후 여권에선 "숙의(熟議) 민주주의의 승리" "국민과 협치" 등 칭찬 일색이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범국민적 공론이 필요한 국가적 문제는 다 공론화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이 현실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 이후 대선뿐 아니라 총선, 지방선거 등에서 모든 정당이 후보 선정을 여론조사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여론조사 공화국'이라고 한다. 이제는 공론 조사가 각종 갈등 사안의 '만병통치약'으로 대접받는 '공론 조사 공화국'에 진입할 태세다. 하지만 공론 조사도 여론조사처럼 조사 회사에서 선정한 극소수 표본에 의견을 묻는 방식임은 똑같다. 여론조사와 공론 조사 모두 참고 자료가 아닌 결정 수단으로 남용(濫用)할 경우 정치적 책임과 정당성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정책 결정을 위한 공론 조사는 찬반 양측의 절충점을 찾는 게 아니라 승패를 가르는 형태로 설계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을 증폭할 우려도 크다. 여권에선 신고리 원전 공론 조사를 성공 모델로 평가하고 있지만, 신고리 5·6호기 건설에 국한됐던 주제에 탈원전을 끼워넣는 식으로 조사해 확정하면서 원전 찬반 양쪽의 불만을 억누른 영향이 컸다.


 

10월20일 김지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신고리 5·6호기와 관련한 최종 공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남강호 기자
공론 조사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공론이 밝혀졌으니 더 이상 다른 말 하지 말라"며 토론과 타협을 중단시킨다는 점이다. 신고리 원전 공론 조사 직후에도 정부는 "탈원전이 국민 뜻"이라며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와 노후 원전 조기 폐쇄 등 탈원전 정책에 대못을 박으며 에너지 정책에 대한 논의를 차단했다. '여럿이 의논한다'는 공론의 의미와 정반대로 공론 조사가 오히려 토론을 막고 '닫힌 사회'를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한 것이다. 김지형 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장도 언론 인터뷰에서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굳이 공론 조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정부와 국회가 먼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권은 낙태를 비롯해 국민연금 개혁, 부동산 보유세 등 모든 사회 갈등 이슈를 공론 조사가 해결해 줄 것이란 만능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최근 국회는 입법 활동을 돕는 보좌진을 7명에서 8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이를 위해 매년 들어가는 예산이 67억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사안을 한 번에 50억원가량 세금이 들어가는 공론 조사 외주에 맡긴다면 '세금 도둑'이란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혈세를 물 쓰듯 하며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국민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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