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20년… 몰락은 한순간, 사라진 너의 이름은

구성= 뉴스큐레이션팀
입력 2017.11.21 09:23 수정 2017.11.21 11:57

1997년 11월 21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구제 금융을 신청한다고 발표했다. 발표 20여 일 전,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한국 경제의 펀더멘탈(Fundamental)이 튼튼하다고 장담했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때였다.

이렇게 시작된 IMF 구제 금융 체제는 30대 재벌 중 17개 퇴출, 은행 26곳 가운데 16곳의 퇴출 등 한국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외환 위기가 닥치기 불과 1년 전에 선진국만 들어갈 수 있는 '경제 개발 협력 기구(OECD)'에 가입한 우리나라에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1997년 11월 21일 밤 정부종합청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외화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조선DB

세계화를 목표로 경제 개발이 한창이었던 1990년대, 일부 기업은 금융 기관에서 무리하게 돈을 빌려 사업을 확장했다. 투자는 마구 늘렸지만 일본의 엔화 약세와 중국의 위안화 평가 절하로 수출은 부진하니 한국 경상수지는 지속해서 적자를 이루고 있었다. 금융 기관도 정부 보증만으로 정확한 평가 없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었고, 금융기관과 기업은 단기적으로 늘어난 채무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 상황에서 1997년 초 부실덩어리 한보철강이 부도나고 이후 11월 초까지 삼미, 진로, 대농,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특히 7월에 발생한 기아그룹 도산은 10조 원에 육박하는 부채를 남겼다. 맞물려 동남아 지역에 금융 위기가 오면서 외국의 채권기관이 채무 상환 기간을 만기 연장해주지 않아 우리나라의 외화가 급속도로 유출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갚아야 할 돈은 1500억 달러가 넘었는데,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외국 돈은 40억 달러에도 못 미쳐서 나라가 파산 직전이었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한 기업들이 무너지고 나라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에 IMF 구제 금융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IMF 구제금융 공식요청)

IMF는 우리나라 정부에 구제 금융을 지원해 주면서 정부의 예산을 줄이고, 은행의 이자를 높이고, 은행과 기업의 개혁과 강도 높은 구조 조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IMF 사태로 국민들은 낙담하기보다 어려운 나라를 살리자며 집에 있는 금을 내다 파는 '금 모으기 운동' 등을 벌이는 등 자발적인 희생을 감수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수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증가하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는 등의 고통도 동시에 겪었다. 

환란 희생자들이 돌아본 IMF 이후 10년

IMF 전후로 대우, 쌍용, 해태, 진로 등 내로라하는 30대 그룹 중 17개가 퇴출당했고, 1998년 6월에는 동화은행, 동남은행, 대동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등이 퇴출당했다. 1996년 당시 30대 그룹 평균 부채비율이 355%였고, 한보의 경우는 2086%에 달했다. 1998년에 자살률이 50%나 상승한 가운데 GDP 성장률은 -6.7%를 기록했다.

1997년에 등재되었던 30대 대기업 집단 중에서 현재까지도 '30대 그룹' 명단에 자리를 유지한 곳은 11곳에 불과하다. 과거 재계를 쥐락펴락하던 상당수 그룹이 경제 위기를 맞아 뿔뿔이 해체되거나 30대 그룹 밖으로 밀려나는 운명을 맞았다.


1997년 1월, 한국의 재계 서열 14위 한보그룹이 부도났다. 무엇보다도 한보그룹 부도가 국민적인 관심을 끈 것은, 정태수라는 기업인이 5조 7000여 억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와 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면서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부도를 발단으로 이와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났고, 이는 건국 후 최대의 금융부정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한보의 제철소가 있는 충청남도 당진의 171개의 영세업체와 외상 거래자들이 피해를 보았고, 국가 대외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해 국가 경제가 막대한 손실을 보게 되었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되었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과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 운영차장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보사태 시나리오
▶[한보부도 파장] 재벌들 충격…제철설비 수천억 물려

1959년 세워진 대일목재공업은 1960년 (주)삼미사를 세웠다. 1973년 삼미사가 대일목재공업을 흡수 합병했고 이듬해인 1974년 한국특수강을 인수하였고, 1977년 삼미금속을 세우고 1978년 우신건설을 인수하는 등 외형을 키웠다. 그러나 1997년 한보사태 여파로 금융권이 자금 대출을 줄이면서 삼미그룹이 자금난에 빠졌다. 그해 3월 모기업인 삼미가 부도를 냈다. 부도 당시 삼미그룹은 재계 순위 26위였지만 부도 이후 삼미그룹은 사실상 해체 순서를 밟았다. 삼미는 1997년 회사 정리절차를 시작했으며 2003년 회사 정리절차에서 벗어났다. ▶도산한 삼미, '3자 인수' 난망

진로그룹은 주력 업종인 음료 사업 외에 화장품, 제조업, 도소매업, 건설업, 운송업, 광고업, 학교법인까지 한때 산하에 24개의 방계 및 계열사가 있고 재계 순위 24위로 오른 바도 있었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1997년 4월 부도유예협약을 처음으로 적용받았으나 같은 해 9월에 법정관리와 화의신청 및 부도를 냈으며, 1998년 3월 진로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주)진로와 (주)진로종합식품을 비롯한 6개 계열사가 서울지방법원과 대법원이 법정관리와 화의신청개시에 대한 인가를 명령받았다. 1999년 12월에 진로의 맥주 사업 부문인 진로쿠어스맥주를 OB 맥주에 매각하였으며, 2000년 2월 진로의 위스키 사업 부문인 진로발렌타인스가 프랑스의 위스키업체인 페르노리카사에 매각되었고, 2003년 1월에는 한국증권거래소(현 증권선물거래소)로부터 상장 폐지당했다. ▶진로그룹 구제금융조건 주식처분 각서 요구방침

1955년 10월 13일 대한농산(주)를 설립되었고 외국 쌀 도입이 주력 사업이었으나, 1968년 금성방직(주)과 태평방직(주)을 인수, 섬유업에도 발을 들였다. 1971년 미도파(주)를 인수하고 1974년 동방흥업(주)의 흡수·합병을 시작으로 1975년 해운대비치(주), 1983년 미도파관광과 관악컨트리 구락부(俱樂部), 1986년 반월 나염공장 등을 인수·합병 하여 사업을 여러 분야로 확장하였다.

1991년 주식을 상장하고, 1993년에 미도파(주)를 모기업으로 전환하였다. 1997년 대농그룹의 모기업인 미도파(주)가 적대적 인수·합병 대상이 되면서 부도유예협약의 적용을 받게 되었고, 같은 해 12월 회사정리절차를 개시, 1998년 9월 회사정리계획 인가가 결정되었다. ▶대농, 1천 150억 결제중단 "휴지조각"

한신공영을 중심으로 건설업으로 성장한 그룹으로 한신아파트가 특히 유명했다. 전성기 때는 백화점 같은 유통업까지 진출했으나, 1997년 6월에 부도로 인하여 해체되었고, 지금 남아있는 한신공영은 코암시앤시개발에 인수된 한신공영의 건설 부문이다.

1997년 7월 15일 자금난을 겪던 기아는 28개 계열사가 부도유예협약적용을 받게 된다. 사실상의 부도이며, 모체인 기아자동차, 아주금속공업(현 메티아), 카스코, 본텍(현대오토넷으로 합병), 위아, 위스코(현대모비스로 합병), 세아베스틸 등 6개 계열사만 남게 되었으며,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자동차와 합병되었고, 나머지 기아그룹 22개 계열사는 대부분 청산, 합병, 법정관리, 화의신청 등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8년 4월 15일 기아자동차가 회사 정리 절차를 끝내고, 5월 15일 우선 협상 대상자에 현대자동차가 선정되었다. 1998년 10월 7일 기아자동차가 인수 우선 대상 협상자로 선정한 현대그룹에 모체인 현대자동차로 낙찰, 인수 계약 양해 각서를 체결하고 국제 입찰하였다. 1999년 3월 기아그룹 부도유예협약적용 1년 18개월 뒤에 국제 입찰을 통해 현대그룹에 모체인 기아자동차가 아시아자동차와 함께 편입되고, 이후 기아그룹의 김선홍 회장은 이른바 '기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구속, 서울교도소에 수감되며 퇴임하였다. 당시 기아그룹은 주식이 어느 개인이나 단체에 집중되어 있지 않아 국민그룹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탓에 기아살리기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펼쳐지기도 했다.
기아자동차는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 즉 소위 '왕자의 난'과 맞물려 2000년 8월 31일 계열에서 분리되며, 현대자동차와 함께 현대자동차그룹을 형성하였다. ▶기아그룹 부도방지협약 적용

전라북도 익산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던 이봉녕이 방적공장을 인수해 창업한 쌍령방적이라는 회사가 모태다. 1977년 10월 유신 정권의 '한글쓰기운동'으로 오늘날의 쌍방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내의 상표 '트라이', 청바지 상표 '리' 등의 인기 상표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1989년에는 한일합섬을 제치고 프로야구 제 8구단 쌍방울 레이더스를 창단하는 등 1980년대에는 호남 연고 기업 중 금호그룹 다음으로 잘 나가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전북 지역 삐삐, 시티폰 사업자였던 전북이동통신을 통해 통신 사업, 무주리조트와 익산골프장을 운영하는 등 레저 산업에도 진출했지만, 무주리조트 건설로 진 막대한 빚을 극복하지 못하고 1997년 10월 14일 부도로 처리된다. ▶쌍방울 1차 부도

1945년 제과업을 하는 해태제과합명회사가 설립되었고, 1960년에 회사 이름을 해태제과공업(주)로 변경했다. 1968년에는 아이스크림 제조업에 진출하였다. 1973년에는 해태유업(주)으로 낙농 제품을 제조 가공, 판매하였고, 1974년에는 해태관광(주)을 설립하여 관광업에도 진출하였다.

1978년 해태상사(주)를 설립하여 무역업에 진출하였으며 1981년에는 광고대행업체인 (주)코래드를 설립하였고 1988년 해태음료가 해태농수산을 흡수합병하였다. 1997년 11월 주력기업인 해태제과(주)가 부도를 냈다. 그룹 해체 직전까지는 재계 서열 24위에 이르는 회사였다. 1998년에 15개 계열사 중 해태상사(주)와 해태 타이거즈만 남고 해체되었다. ▶해태 3개 계열사 부도

뉴코아는 1970년대 초 한신공영 김현종 창업주의 사위였던 김의철이 반포지역 일대의 땅을 사들여 지은 아파트 사업이 잘 되자 1978년 유통업 진출을 결정하면서 뉴코아 슈퍼마켓을 운영하게 된다.
1981년 뉴코아는 별도법인으로 분리된 후 1984년 뉴코아 주식회사로 변경하였고 서초구 일대에 고객유치를 위해 수십 대의 대형버스를 운영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1990년대 들어 점포를 크게 늘릴 정도로 백화점 사업이 거듭 성장하고 1994년 할인점 사업에 진출하면서 뉴코아는 재계 30대 그룹에 들어갈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하지만 고금리시대로 이자율 높았던 시절에 무리하게 매장 수 확장을 하면서 부채는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고, 외환위기라는 악재를 맞게 되면서 부도가 났다. ▶뉴코아그룹, 화의 신청

1962년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동생인 정인영이 현대양행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을 빼앗겨 위기를 맞이했으나 자동차 부품회사 만도기계를 설립한 후 빠르게 성장한 이후 만도,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한라공조, 한라건설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1997년 재계 순위 12위의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97년 12월 외환위기를 겪으며 한라건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열사가 해체, 매각되었다. 이후 2008년 모기업인 만도기계를 다시 인수하여 그룹의 재건을 이루게 되었다. ▶한라, 16개계열사 거느린 재계 서열 12위그룹

극동건설대영건설사는 1953년 극동건설(주)로 이름을 바꾸고,1954년 남대문시장 신축공사를 맡았다. 1956년 서울시민회관을, 1967년에는 대연각 호텔을 지었다. 대연각 호텔은 극동건설이 직접 지분을 출자해 지은 호텔이었는데 1971년 이곳에서 대형 화재가 나 163명이 숨지고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화재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대형 참사가 벌어졌고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건설과 소방시설의 변화를 가져왔다.

1970년대 들어 아산방조제, 서울지하철 1호선, 남양방조제 등 정부가 발주한 공사를 중심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1970년대 극동건설은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환기업, 삼부토건 등과 함께 '건설 5인방'으로 불리며 업계를 주도했다. 1986년 국제상사의 건설부문(국제종합건설)을 인수하고 같은 해 동서증권과 동서경제연구소를 인수하며 금융업에 진출했지만 무리하게 자금을 지출한 탓에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과 1998년 두 회사가 잇따라 부도를 내면서 경영난에 빠졌다. 극동건설도 1998년 부도 처리됐고 같은 해 7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2003년 6월 극동건설은 1700억 원에 외국계 투자회사인 론스타에 인수되고, 이 해에 극동건설은 법정관리 절차를 마쳤다. 2007년 웅진그룹의 지주회사인 웅진홀딩스가 론스타로부터 극동건설을 인수하면서 지배주주가 됐다. 2013년 2월 극동건설은 웅진홀딩스로부터 독립하였고, 법정관리도 마쳤다. ▶극동, 동서증권-국제종건 두 기둥사 부도로 휘청

1979년, 창업주가 금성 주택을 설립하여 부동산 투자를 한 것으로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 금성주택의 상호를 거평건설로 바꾸고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건설업과 부동산 사업이 잘 되자 1991년 거평식품과 대동화학을 인수해 6개의 계열사를 가진 그룹으로 성장했다. 1992년, 동대문 인근 덕수중학교와 덕수고등학교 부지를 인수하여 당시 최대 패션타운인 거평프레야를 지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1994년에는 공기업 민영화 1호인 대한중석을 인수하였다. 1995년에는 한국시그네틱스를 인수하여 거평시그네틱스(현 한국시그네틱스)로 개칭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포항제철 계열사인 포스코켐, 정우석탄화학 인수, 1996년 강남상호신용금고와 새한종합금융, 1997년 3월에는 태평양패션을 인수하였다.

한남투자증권을 무리하여 인수하였는데, 이는 결국 그룹의 부도를 불러오는 계기가 된다. 급속한 성장으로 생존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거평그룹은 고금리와 금융기관의 신규대출 축소, 자금회수 등으로 압박을 받아오고 있었다. 위기의 거평그룹은 자발적인 구조조정 안으로 생존하고자 1998년 5월 12일,  19개 계열사 중 4개사(거평시그네틱스, 거평제철화학, 거평화학, 한남투자증권)만 남기고 나머지 15개 계열사는 부도 처리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거평그룹은 창업 약 20년 만에 스스로 그룹 해체를 선언하게 되었다. ▶거평그룹, 덩치 70%줄어 미니그룹으로 남게될듯

모기업인 아남반도체(주)는 1956년에 설립되었으며, 한국 최초로 1968년 반도체, 1974년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한 이래 AV기기 및 가전, 전자부품, 광학기기, 시계사업, 정보통신, 환경산업 등에 진출했다.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그룹이 해체되었다. 아남반도체(주)는 2004년 동부그룹에 합병되었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창희가 창업했으며 삼성에서 분리해 그룹을 형성한 직후부터 대대적인 사업확장에 나섰다. 1973년에 새한종합개발, 새한콘크리트 등을 묶어 새한미디어그룹을 만들었다.

1997년 당시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순위 20위 중반의 중견 그룹인 새한그룹으로 정식 출범하였으며 '그룹 모양새'를 갖추기 위하여 주력부문과 관계없는 업종의 계열사를 그대로 끌고 가는 등 구조조정을 등한시하였다. 새한미디어도 비디오 사업의 성장성이 높다는 판단 아래 시장의 정점이던 1995년 대규모 설비투자에 나섰으나 비디오테이프 산업의 사양화 및 미미한 영업실적으로 그룹의 어려움을 가중했다. 2000년 계열사 전체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사주 일가가 주식포기 각서 제출 후에 워크아웃이 승인, 개시되어 계열사는 모두 매각하거나 청산되었다.

'탱크주의', '세계 경영'으로 승승장구했던 대우는 1967년 대우실업을 모태로 금융, 전자, 중공업, 자동차 등으로 사업을 넓히며 20여 년 만에 4대 그룹 안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옛 공산권 국가와 개발도상국에 공격적으로 해외법인을 세우며 사세를 크게 키웠고 1993년 당시 150여개 수준이었던 대우의 해외법인은 1998년 11월 396개까지 늘었다. 30개의 계열사를 보유하고 자산총액 35조5000억 원을 자랑하는 국내 대표 기업 중 하나였다.

대우그룹은 IMF 당시인 1998년 쌍용을 인수하면서 재계 순위 2위로 도약했지만 무리한 사세 확장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삼성을 제치고 재계 서열 2위에 오른 지 1년 만인 1999년 8월, 대우는 채권단 관리하에 워크아웃을 맞이함으로써 그룹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11개 계열사는 회사가 통째로 팔리거나 사업 부문별로 분할 매각되면서 각자도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우그룹, 결국 워크아웃에
▶'김우중 신화' 32년만에 갈림길

1939년 대구에서 설립된 비누공장 삼공유지(三共油脂)를 모태로 하여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1940~1950년대의 면방직, 보험, 무역, 1960년대의 시멘트, 제지, 해운, 1970년대의 정유, 중공업, 종합상사, 건설, 1980년대의 컴퓨터, 증권,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기초기간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딱히 주력 사업이 없는 데다가 1980년대 자동차 산업 진출과 외국 자동차 회사를 인수 하고 1992년부터 쌍용자동차에서 무리한 기업확장으로 인한 엄청난 적자를 기록함과 동시에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 때마침 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1997년 쌍용제지㈜를 미국 P&G에 매각하였고, 1998년 쌍용자동차㈜를 대우그룹에, 쌍용투자증권㈜ 을 미국의 H&Q AP에 매각하였다. 이후에도 계열사를 지속해서 매각하여 쌍용양회공업㈜ 등 몇몇 계열사만 명맥을 유지함으로써 쌍용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쌍용 그룹 완전해체…종합조정실-비서실 없애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하여 600여만 달러의 도로공사를 수주한 것을 시작으로, 1978년 사우디아라비아 체신청이 발주한 자동전화 확장공사,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서부 산악지대에 건설한 산악도로공사, 1983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 등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건설을 주력업종으로 했던 그룹이었다. 건설 외에는 운송·엔지니어링·무역·관광개발·종합환경·금융·콘크리트구조물제조 사업 등을 했다.

1998년  9월 구조조정협약에 따라 동아건설산업(주) 외에 나머지 계열사는 정리한다는 방침에 동아증권(주), 동아엔지니어링 등을 매각하는 등 강도 높은 계열사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2000년 11월 동아건설산업(주)이 최종부도 처리되어 법정관리 대상기업으로 결정되었다. 이듬해인 2001년 5월 동아건설산업(주)이 파산선고를 받음으로써 동아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동아, 그룹 해체로 회생 도모


IMF사태 후 전경련이 발표한 'IMF 2년의 평가'라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경제에서 의심없이 받아들여진 준칙들이 모두 깨어졌다고 했다. 

◆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
1999년 9월 말까지 전체 은행 33개 중 5개가 인가취소되고 4개가 흡수 합병되는 등 9개가 줄었다. 27.3%의 구조조정 비율을 보인 것이다.

◆대기업은 영원하다
기업 규모가 클수록 도산 위험이 적다는 대마불사 신화가 깨졌다. 재계 순위 2위였던 대우가 무너졌으며, 한화, 두산, 한솔, 효성, 대상 등도 계열사 분리, 매각, 합병 등으로 그룹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 부동산이 가장 안전한 자산
과거에는 개발과 투기 수요로 인해 부동산을 보유하는 것이 기업 성장의 대안이었다. 하지만 IMF 이후 부동산 가격의 폭락과 함께 환금성이 떨어지는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자산 계층과 기업이 고통을 겪는 현상이 나타났다.

◆ 평생을 한 직장에서
기업체의 상용직 비율은 97년 9월 32.8%에서 98년 9월 31.1%, 99년 9월 28.9%로 급격히 줄고 있다. 반면 일용직 비율은 지난 2년간 9.2%에서 12.1%로 크게 늘었다. '평생 직장' 신화가 깨진 대신 '평생 직업'의 개념이 대두했다. 특정 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지닌 엘리트와 단순한 사무-노무직간에 급여와 고용안정성의 차이가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IMF로 4대신화 깨졌다

모든 기업이 축소되고 뿔뿔이 흩어진 것은 아니다. 삼성·LG·효성 등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덩치를 키우고 세계 1위의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도약했다. 삼성은 IMF 당시 사내 재무팀이 경영 상태를 진단한 뒤 '이익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주력 사업을 전자·금융·무역 등 3~4개로 압축하고, 나머지 계열사를 과감히 정리했다. 재계 관계자는 "기술 제휴, 기술 개발 등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원천 경쟁력 확보에 주력해 온 게 지금의 글로벌 삼성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20년 전 51조원이던 삼성의 자산 총액은 7배가 넘는 363조원으로 늘어났다.

LG 역시 GS·LS 등이 계열 분리로 떨어져 나갔지만 전자·디스플레이·화학 등 핵심 업종에 집중해 4위를 유지하고 있다. IMF 직후 11위였던 롯데는 재계 순위 5위에 올라서 상승 폭이 가장 컸다. 지난 20년 사이 포스코·KT·신세계·미래에셋·한국투자금융 등 15곳이 새롭게 30대 그룹에 편입됐다.

IMF 외환 위기 전인 1997년 4월 삼성에서 분리된 신세계와 CJ는 매출 성장과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사업 확장으로 덩치를 키우면서 30대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30대 그룹 중 11곳만 남았다

2001년 8월에 IMF 차입금 전액인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하였다. 이는 구제금융을 신청한 지 3년 8개월 만이며, 당초 예정보다 3년 가까이 앞당겨 빚을 정리한 것이다.그리고 IMF 구제금융 사태 후 20년. 아직 그 후유증은 길게 남은 듯 보인다.

파산 위기에 몰린 한국 정부를 대표해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임창열 전 부총리(현 킨텍스 대표)는 IMF 구제금융을 계기로 추진됐던 각종 정책이 '미완의 개혁'에 그치면서 아직까지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관료와 노동조합의 저항으로) 규제 혁파와 노동 개혁이 제대로 안 된 게 가장 아쉽다"고 했다. 지난 14일 IMF는 우리 정부와 연례협의에서 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성을 다시 언급했다.

금모으기 운동. /조선DB

임 전 부총리는 노동 개혁과 관련 "지금이라도 정부가 노동계와 대화를 해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노동자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는 건 맞지만, 노동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을 요구하면 경제가 못 견디고 기업들은 해외로 가버린다"면서 "정규직으로 채용했다가 회사가 어려워지면 해고할 수 있도록 하고, 경기가 좋아지면 해고됐던 사람들부터 다시 채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임 전 부총리는 현재의 한국 경제에 대해 "외환위기는 일시적 급성질환이지만, 지금은 서서히 죽어가는 암에 걸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임 전 부총리는 특히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경쟁력 상실을 가장 우려했다. 그는 "중국이 정말 무섭다"고 했다. 조선은 이미 중국에 빼앗겼고, 자동차는 중국이 턱밑까지 쫓아왔다는 것이다. 전자도 얼마 안 남았고, 반도체도 중국이 엄청나게 투자를 늘리고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임 전 부총리는 "우리 주력 산업의 생명을 어떻게 연장할 수 있을 것인지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심각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 전 부총리는 구제금융 협상 과정과 IMF 체제에서 경험했던 국제 사회의 냉대와 경제 주권 상실 상태를 한국 경제가 또다시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며 "국제사회에서 약자(弱者)가 되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이 뜯기고 피를 빨린다"며 "다시는 약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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