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있는 수교史] 6·25전쟁 후 끊긴 한-중을 다시 이은 '뜻밖의 사건'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이시연
입력 2017.11.20 08:05 수정 2018.01.08 17:55

막강한 권력을 쥔 시진핑(習近平) 정권 집권 2기가 출범했다. 집단지도체제를 표방하고 있는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을 필두로, 25명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하 정치국원)들이 국가를 통치한다. 시 주석은 중국 공산당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당장(黨章·당헌)에 자신의 이름을 단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명시하고, 정치국원 대부분을 자신의 측근으로 채워 사실상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자로 올라섰다. 이에 국제사회는 중국 '시황제'의 시대가 열렸다고 평하고 있다.

지난 10월 18일 '시진핑 정권 집권 2기'를 알리는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체대표대회(당대회)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연설하고 있다. 이날 A4용지 68쪽에 달하는 자신의 국정운영 지침을 3시간 24분에 걸쳐 연설했다. /연합뉴스


우리나라 정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양국 외교부 실무진들의 물밑 협상 끝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때 한-중 정상회담이 개최됐고, 연이어 문 대통령의 방중이 성사됐다. 상대방을 알아야 어떤 상황이 와도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처럼 황제급 시진핑의 시대를 대비해 합리적인 외교 전략을 세우려면, 중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오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대부분을 함께한 이웃 나라가 중국이다. 한-중은 영토 전쟁을 벌이며 서로를 적으로 여겼다가도 교류를 확대하면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고려 후기 이후 국력 차이로 인해 사대(事大)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됐지만, 일제강점기 들어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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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전 주석이 이끄는 공산당이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세력을 몰아내고(이후 대만으로 中華民國 정부 이전), 1949년 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을 건국했다. 현재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왔다. 한반도의 44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와 13억 명의 세계 최대 인구를 가진 중화인민공화국과 우리나라의 접점은 언제부터일까?



1950년:
'인해전술' 앞세워 6·25 참전한 중공군

국공내전(國共內戰)* 당시 중국 공산당(중공)은 김일성이 지휘하는 북조선 인민군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때 이미 '북조선이 서울에 대한 전쟁을 개시할 때 중공이 군사적 원조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 국공내전: 일본의 세계대전 패배 이후 중국 재건을 둘러싸고 공산당과 국민당이 벌인 내전.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 전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곧이어 소련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과 국교를 수립했지만, '반(反)공산주의'였던 미국과는 대립했다. 미국의 지지를 받는 대한민국 정부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위 왼쪽부터) 유엔 깃발을 전달받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총사령관과 인천상륙작전 수행 위해 부산항에 집결한 국군 해병대와 미국 해병대 대원들. (아래 왼쪽부터)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과 인해전술 펴는 중공군. /조선DB

이듬해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국군과 미군을 주체로 하는 국제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났다가 9월 15일 일명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남한 대부분의 영토를 수복한 뒤 38선 이북 압록강·두만강 일대까지 북진했다. 국제연합군이 중국 접경지에 다다르자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이 개입했다. 북한에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 파병으로 국제연합군의 우세가 다시 꺾였다. 양 진영 간 밀고 밀리는 전투 중에 1951년 7월 10일 소련이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한반도에서 군인·민간인 합쳐 수백만 명의 큰 인명피해를 남긴 6·25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정전협정에 서명하면서 비로소 멈췄다.

정전협정 이후 미국 영향권의 국가와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가 대립하는 냉전 시대를 맞았다. 이는 민주 국가인 우리나라와 공산 국가인 중공이 수교를 단절한 채 적대 관계를 유지하게 된 배경이었다.


1983년:
한-중을 다시 이은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1983년 5월 7일자 조선일보 캡처

우리나라는 중화민국(지금의 대만)을 '중국'으로 부르며 수교하고 있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공'으로 부르며 공식 외교 접촉을 일절 하지 않았다. 중공과의 정식 회담이 열린 것은 6·25전쟁 발발 30여 년이 흐른 뒤였다. 1983년 5월 5일에 일어난, 이른바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 계기였다.

승무원 포함 105명을 태운 중국민용항공총국 소속 여객기 1대가 랴오닝성 선양에서 상하이로 향하던 중 무장범 6명에게 공중 납치를 당했다. 민항기는 항로를 이탈해 강원 춘천 주한 미군 기지에 불시착했다. 그 당시 중공 여객기가 38선을 넘은 까닭에 서울과 경기 지역에 경계경보가 4분간 내려졌다. 잠깐이었지만, 어린이날 휴일을 즐기던 시민들은 갑자기 사이렌 소리와 함께 라디오로 공습 발령 방송이 흘러나오자 긴장했다.

(왼쪽부터) 1983년 5월 5일 공중 납치된 중공 민항기가 강원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했다. 이후 5박 6일간 서울에 체류한 중공 사람들이 양손에 선물꾸러미를 들고 귀국하고 있다. /조선DB

이튿날 중공 당국은 우리 정부에 여객기와 승무원·승객 송환에 대한 교섭을 제의했다. 우리 정부도 경색된 중공과의 관계를 풀기 위해 중공 대표단의 방한에 응하고, 중공 승무원·승객들이 머무는 동안 부상자 입원·고급호텔 숙박·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 관광 등 호의를 베풀었다. 이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낼 때도 컬러TV나 인삼주·담배·넥타이 등 우리나라 기업들이 제공한 선물 보따리를 안겨줬다.

우리나라와 중공 양국은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대면한 이후 아시안게임·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 대회와 같은 비정치적인 영역부터 교류를 시작했다.


1990년:
베이징AG 이후 대륙 점령한 '검은색 쏘나타'

故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규모 민간 사절단을 이끌고 1991년 7월 19일 중국으로 떠나기 앞서 김포공항에서 출국 인사를 하고 있다. /조선DB

현대자동차는 1990년 9월에 열린 북경(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최를 기념해 쏘나타 112대와 엑셀 89대 등 승용차 201대를 대회 운영 차량으로 무상공급했다.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혜안이 돋보였다. 중공에서 아시안게임을 치른 뒤 현대차가 '값싸고 튼튼하다'는 입소문이 나 밀수가 성행할 만큼 현대차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다. 특히 검은색 쏘나타는 웃돈이 붙어 정가보다 서너 배 비싼데도 없어서 못 살 정도였다.

쏘나타의 인기는 현대차가 훗날 정식으로 대중(對中) 수출에 나설 때도 다른 자동차 기업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했다. 우리나라 자동차 기업들 가운데 중공 본토 내 자동차 생산기지를 처음으로 마련한 것도, 중공 정부와 처음으로 자동차 수출 계약을 맺은 것도 현대차였다.


1992년:
우리나라에서 '중공' 딱지 뗀 중국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냉전 시대의 종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국제사회에서 공산국들과 교류가 급속히 진전됐다. 우리나라와 중공 역시 외교 실무진들이 비밀리에 서울과 북경을 오가며 수교를 위한 교섭을 진행했다. 양국의 수교 조건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리 측은 6·25전쟁 참전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고, 중공 측은 중화민국과 외교 단절을 원했다. 이와 함께 수교 발표 시점과 장소 등을 논의했다.

/1992년 8월 24일 ~ 8월 26일자 조선일보 캡처

1992년 8월 24일 오전 10시, 우리나라와 중화인민공화국은 북경에서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내용의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해방 이후 47년 만에 양국이 공식 수교를 체결했다. 공동성명에 6·25 참전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사과는 빠졌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만이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중국 일부라는 점은 명시됐다. 이에 지나치게 중화인민공화국 측 입장을 수용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었다.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은 "교섭과정에서 중국이 6·25전쟁은 국경의 위협 속에서 이뤄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한 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면서 "중국과의 수교는 미래를 위한 일임을 이해해달라"고 밝혔다.

주한 대만 대사관 → 주한 중국 대사관으로 바뀌었다. /조선DB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중공이라는 국호는 보기 힘들어졌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일컫는 국호가 됐다. 반면, 이전에 중국으로 불렸던 중화민국은 중심 영토의 이름을 따와 '대만(臺灣·Taiwan)'으로 불렸다. 주한 대만 대사도 한-중 공식 수교 발표와 동시에 철수했다. 주한 대만 대사관에는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대만 국기)가 내려가고, 중국 외교관들의 입성을 알리는 오성홍기(五星紅旗·중국 국기)가 올라갔다.


1992년:
한국 대통령 최초로 국빈 방중한 노태우

/1992년 9월 28일자 조선일보 캡처

양상쿤(楊尙昆·양상곤) 전 주석의 초청으로 1992년 9월 27일부터 3박 4일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한-중 정상회담도 최초로 열렸다. 노 전 대통령의 최대 관심은 양국 간 교역 확대였다. 노 전 대통령 방중 때 강진구 당시 삼성전자 회장,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구자학 금성일렉트론(지금의 SK하이닉스) 회장,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 경제 사절단 37명이 수행했다. 대중 수출길을 열기 위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총출동했다.

중국 언론도 노 전 대통령의 방중을 보도하면서 경제인들의 동행을 크게 다뤘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1면 톱기사에 노 전 대통령의 방중과 양상쿤 전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잇달아 게재했는데, 경제 협력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두 나라 국민들이 한 배를 탄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국제면에는 삼성그룹의 성공 비결 등 우리나라 기업의 경영 전략을 소개했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을 확인하고 왔다는 것도 의의가 있었다. 한-중 공식 수교 이후 노 전 대통령은 남북한 관계 개선에 의지를 보였지만 북한 핵 개발 의혹이 불거져 난처한 상황이었다. 노 전 대통령 방중 때 중국은 한반도에서 어떠한 핵무기와 핵 개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했다.


북한 핵개발 강행 준비… IAEA, 오늘 특별사찰 입장 공식 표명

1993년:
중국에 들어선 '35만 평' 한국 공단

1993년 8월 18일 중국 천진(天津·톈진)에서 한국공단 조성 공사가 첫 삽을 떴다. 천진 한국공단은 중국 본토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첫 공단으로, 한국토지개발공사가 약 35만 평 토지 사용권을 50년간 취득한 다음 총사업비 235억여 원을 들여 건설했다. 이곳에 100개가 넘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입주해 공장을 운영했다. 천진 공단에서 최초로 공장을 건설한 기업은 금속패널을 생산하는 ㈜대륭산업이었다. 이어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트레이드(지금의 포스코P&S)와 레저용품 제조사인 신아스포츠산업 등이 공장을 완공했다.
◀1993년 9월 13일자 조선일보 캡처

중국 상하이 푸둥(浦東)에 있는 LG전자 공장의 내부 전경. /조선DB

우리나라보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고 원자재 물류비가 비싼 데다 수출 관련 행정 절차가 복잡해 중국 현지 경영 환경이 녹록지 않은데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기꺼이 대중 투자에 나섰다. 당시 중국인 임금이 우리나라의 8분의 1 수준으로, 값싼 노동력 때문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아 잠재적인 시장 가치가 높다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였다.

이렇듯 우리나라 기업들의 중국 진출이 확대되면서 1994년 4월을 기준으로 대중 투자 규모가 300억 달러를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한-중 공식 수교 직후 3억 달러에 불과했었으나 2년 새 100배 증가했다.

한편, 중국 최초의 고속버스를 운행한 것도 우리나라 기업이었다. 북경 경한기차객운유한공사가 1994년 3월 7일 중국 정부로부터 사업 허가를 받아 북경과 천진 사이 132㎞ 노선을 달리는 고속버스 25대를 투입했는데, 우리나라 경한고속이 북경 경한기차객운유한공사의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다.


천진 한국공단 기공
중국 첫 고속버스 한국기업서 운영

1994년:
한-중 수교 상징이 된 백두산 호랑이

합방해도 남남처럼 지내는 백두산 호랑이 부부 백두와 천지. /조선DB

장쩌민(江澤民·강택민) 전 주석은 1994년 3월 26일부터 4박 5일간 방중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백두산 호랑이 한 쌍을 선물했다. 김 전 대통령 방중에 맞춰 한-중 우호의 증표로 기증한 것이었다. 산림청은 수컷의 이름을 '백두'로, 암컷은 '천지'로 지어 경기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해줬다.

우리나라에서는 1921년 경북 대덕산에서 1마리가 사살된 뒤 백두산 호랑이를 볼 수 없었다. 백두와 천지, 이 부부 덕분에 국민들이 멸종했던 백두산 호랑이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백두와 천지는 2세를 생산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각각 2011년(21세)·2010년(20세)까지 장수했다. 특히, 21살에 노화로 폐사한 백두는 국내 최장수 호랑이로 기록됐다.

경기 용인 삼성 에버랜드에서 2014년 한-중 정상회담 합의를 통해 국내에 들여온 판다 암수 한 쌍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조선DB

10년이 흐른 뒤 중국은 한-중 수교 기념으로 판다 한 쌍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이 2014년 7월 3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때 판다 기증을 약속했다. 수컷 판다인 '러바오'와 암컷인 '아이바오'는 현재 경기 용인 삼성 에버랜드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95년:
중국 국가원수 최초로 방한한 장쩌민

◀1995년 11월 14일자 조선일보 캡처

1995년 11월 13일부터 4박 5일간 장쩌민 전 주석이 한국을 방문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이 수교를 수립한 이래 중국 국가주석이 방한한 것은 장쩌민 전 주석이 처음이었다. 6·25 참전에 대한 부담 탓에 중국 국가원수가 우리나라를 오기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1년 앞서 방한한 리펑(李鵬·이붕) 전 국무원 총리가 "어떻게 동아시아에서 그런 나라가 생겨났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국의 발전은 눈부시다"는 보고를 올린 뒤 장 전 주석이 마음을 먹었다.

우리나라에 열린 첫 한-중 정상회담은 일본 과거사 문제에 뜻을 같이했다는 점이 뜻깊었다. 장 전 주석 방한 전후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당시 일본 총무청 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일본이 한일 합방으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도로항구와 같은 사회 시설을 건설하는 등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는 망발을 해 일본에 대한 국내 여론이 좋지 못했을 때였다. 장 전 주석이 김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일부 인사들이 아직도 완강하게 그릇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며 단호한 어조로 비판했다. 양국 정상이 일본 정부를 향해 역사를 똑바로 인식할 것을 한목소리로 주문한 순간이었다.


중국 국가주석 첫 방한
韓中 정상 일본망언 비판 발언록

1997년:
한류 열풍 견인한 '사랑이 뭐길래'

중국 국영중앙TV(CCTV) 방영 프로그램 중 1997년 하반기를 달궜던 외국 드라마가 있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였다. 1991년~1992년 MBC 제작 드라마인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으로 수출돼 매주 일요일 아침 9시부터 2시간 동안 CCTV 제1채널에서 방영됐다. 6월 중순 방영 초기 시청률은 2.5%(시청자 약 2200만 명 수준)였으나 극이 전개될수록 상승 곡선을 탔다. 재방영 때는 시청률 15%를 넘나들었다.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캡처

'사랑이 뭐길래'가 이토록 인기가 높았던 것은 우리나라의 대가족 제도와 가부장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중국에는 1자녀 핵가족 제도가 보편화돼 있었고 여성의 발언권이 센 편으로, 남성성을 보여주는 '터프가이' 역할이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주인공인 '대발이' 역의 최민수 씨와 대발이 아버지 역의 이순재 씨가 중국인 시청자들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랑이 뭐길래' 방영 이후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수출됐다. 지상파 3사의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까지 중국 TV를 통해 방영되며 한류의 시작을 알렸다.


한국 TV드라마 중국서 큰 인기

2000년:
울며 겨자 먹기로 '마늘협상안' 타결

우리나라는 통마늘의 경우 수요량의 2~4%에 대해 50%의 관세율을 매겨 수입하고, 수요량의 2~4%를 넘으면 360% 이상 높은 관세율을 매겼다. 오랜 보관이 힘든 냉동 마늘과 초산조제 마늘(식초에 절인 마늘)에 한해 30%의 낮은 관세를 매겼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전신인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라 우리나라 농민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2002년 7월 22일 한-중 마늘 수입쿼터 협상 규탄 대회에 참석한 농민들. /조선DB

그런데 국내 수입업자들이 중국 현지에서 통마늘을 냉동 마늘이나 초산조제 마늘로 작업해 들여오는 편법을 썼다. 중국산 마늘이 헐값으로 대거 수입되자 국내 마늘농가 피해가 우려돼 농협이 피해구제를 신청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2000년 6월 1일자로 중국산 냉동 마늘과 초산조제 마늘의 관세율을 최고 315%로 대폭 올리는 '세이프가드(Safe guard·긴급수입제한)'를 조처했다.

일주일이 지난 7일 중국은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의 수입을 전면 중단하는 경제 보복을 단행했다. 한중 간 '마늘 분쟁'이 시작됐다. 중국의 갑작스러운 수입 중단은 국내 유화업계와 휴대전화업계의 매출 급감으로 이어졌다. 결국, 우리 정부는 저자세로 중국과 교섭에 나섰다. 중국이 수입 중단 조치를 푸는 대신 우리나라는 3년간 3만 2000㎏ ~ 3만 5000㎏의 중국산 마늘을 30%의 관세로 적용해 수입하기로 했다. 이로써 중국과의 마늘 분쟁은 두 달 만에 마늘 농가로부터 "굴욕적 합의"라는 비판을 받고 유화·휴대전화업계에 1억 달러 이상 손실을 끼친 채 해결됐다.


[마늘분쟁] 협정위반 안했는데도 中압력에 '백기'
From. 중국… 이것이 대륙의 복수다

2002년: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로 129명 참사

2002년 4월 16일 경남 김해 돗대산 중국 여객기 추락사고 현장. 사고기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운데 구조대원들이 현장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조선DB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40분쯤 북경에서 출발한 중국국제항공공사(에어차이나) 소속 CA-129편 여객기가 경남 김해 돗대산 중턱에서 추락했다. 순식간에 화염이 치솟았고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

승무원 11명 포함 총 166명이 탄 CA-129기는 김해국제공항 착륙을 시도하던 중 정상적인 '서클링' 궤도를 크게 이탈해 돗대산에 부딪혀 추락했다. 여객기의 머리 부분과 동체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다른 부분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승객들은 피범벅이 된 채 숲속 곳곳에 널브러졌다. 소방관·경찰관 1000여 명과 군인 800여 명이 사고 현장에 투입됐으나 화염 속에서 폭발음이 들리는 등 여객기 폭발이 우려돼 구조작업이 어려웠다. 이 사고로 129명이 숨졌고, 37명이 다쳤다. 심하게 훼손돼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시신도 있었다.

*서클링 랜딩(Circling landing): 김해국제공항 도착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진입하는 남측 활주로를 이용해 착륙한다. 그러나 강한 남풍이 불면 기존과 반대 방향으로 180도 회전해 북측 활주로에 착륙하는데, 이를 서클링 랜딩이라고 한다.

2002년 4월 15일 돗대산 정상 부근에 추락한 에어차이나 소속 보잉 767기의 잔해가 연기를 내뿜으며 불타고 있다. /조선DB

국내에서 외국 국적의 항공기가 처음으로 추락한 '에어차이나 김해 추락사고'는 많은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였다. 그러나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국 민항총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유족 측의 반발을 샀다. 지체되는 사고 원인 조사와 배상금 합의에 유족들의 속만 타들어 갔다. 사고 발생 2년 8개월 만에 우리 국토교통부와 중국 민항총국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건립에 합의, 중국 민항총국이 35만 달러를 지급해 김해시 상동면에 항공기 꼬리를 형상화한 높이 12.9m의 위령탑을 세울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항공기 기장의 운항 미숙이 사고 원인이었지만, 이를 밝혀내는 데 3년이 걸렸다. 유족 측이 에어차이나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7년간 이어졌다. 2009년 12월 24일에 이르러서야 "CA 여객기 김해 추락사고는 조종사 과실 탓이며 항공사는 사망자 1명당 1억 5000만 원, 부상자 1명당 5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08년:
한-중 해·공군 간 '핫라인' 개통

북한은 NLL(Northern Limit Line·북방한계선) 인근에서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 군사적 도발을 감행한 데에 이어 2006년 10월 9일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1차 핵 실험'을 했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과 핵 개발 문제는 우리나라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의 도발은 물론 북한 내 우발 사태를 대비해 북한과 가까운 중국과도 전략적인 소통이 필요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한-중 간 신뢰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군사 '핫라인(직통전화)' 개설에 나섰다. 중국과 긴밀한 정보 공유를 통해 북한을 압박하는 동시에 한반도에서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국이 남북한 사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한-중 양국은 방공식별구역과 배타적경제수역 모두 중첩된 지역이 있어 상공과 해상에서 무력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중국도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군사 핫라인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군사 핫라인을 개통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중국이 우호 관계에 있는 북한을 의식해 우리나라와 군사 교류를 확대하는 것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후진타오 전 주석이 2008년 8월 25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있다. /조선DB

2006년 당시 한-중 국방부 실무진들끼리 군사협력 방안을 논의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로 끝났다. 이로부터 2년 뒤인 2008년 8월 25일 이명박 전 대통령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군사 핫라인을 설치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양국 해·공군 사이에 군사 핫라인이 정식 개통된 것은 같은 해 11월 24일이었다.

한-중 해·공군 간 핫라인은 팩스 기능을 갖춘 다이얼 방식의 국제전화로, 해군 핫라인은 우리 측 평택 제2함대사령부 지휘통제실과 중국 측 칭다오(靑島) 북해함대사령부 지휘통제실에, 공군 핫라인은 우리 측 대구 제2중앙방공통제소와 중국 측 지난(濟南)군구 공군지휘소에 각각 설치됐다. 중국이 다른 나라의 사령부급 부대와 핫라인을 개통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었다.

한편, 더 진전된 개념인 양국 국방부 간 핫라인은 7년이 더 지난 2015년 12월 31일에 개통됐다. 이제는 양국의 국방부 장관이 직통전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韓·中 '해·공군 핫라인' 개통
韓·中 국방부 '핫라인' 개통

2011년:
중국 어민이 한국 해경 흉기로 살해

우리나라 서해로 넘어와 불법 조업을 벌이는 중국 어선이 해양경찰의 단속에 걸렸을 때 저항하는 방법이 날로 흉포화·조직화하고 있다. 양국이 공식 수교하기 이전부터 중국 어선의 서해 불법 조업이 골칫거리였으나 당시만 해도 중국 불법 어선이 해경의 단속에 걸리면 도망가기에 바빴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 불법 어선은 쇠파이프·삽·죽창 따위로 무력 저항하더니 급기야 선체 둘레에 뾰족한 철망을 두르거나 쇠꼬챙이를 꽂고 무리를 지어 단속정을 방해하는 작전을 펼치는 등 해경에 대한 공격 수위가 높아졌다.

(왼쪽부터) 2003년 10월 24일 서해 불법조업을 하다가 도주하는 중국 어선들과 2011년 1월 14일 서해 불법조업 중 일렬로 묶은 채 해경 단속에 저항하는 중국 어선들. /조선DB

2011년 12월 12일 인천 소청도 남서쪽 85㎞ 해상에서 중국 어선 선장이 해경 특공대원을 날카로운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어선 2척은 해경의 "물러나라"는 방송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 조업을 계속했다. 평소 고난도 훈련을 받아왔던 16명의 해경 특공대원들이 앞장서 중국 어선을 나포하고 중국인 선원 9명을 차례로 제압했다. 갑자기 중국 어선 1척이 다른 어선을 쿵쿵 들이받는 돌출 행동을 하자 붙잡혀 있던 선장 1명이 유리 조각을 마구 휘둘러 이청호 경장을 살해했다. 이 경장은 방검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조끼가 가려지지 않은 부위인 왼쪽 옆구리를 깊숙이 찔려 과다 출혈로 숨졌다.

이 경장을 살해한 선장은 해경 조사 때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면서 "흉기를 쥐지도 않았고, 찌른 적도 없다"며 혐의를 부인하는 뻔뻔함을 보이다 징역 30년에 벌금 2000만 원의 처벌을 받았다. 거기다 중국 정부는 사과 한마디 없이 "한국과 긴밀하게 협력해 원만하게 처리하고자 한다"는 식의 가벼운 유감 표명으로 그쳤다. 사후 대처에 분노를 느껴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성향 시민단체 회원 400여 명과 퇴역경찰 모임인 대한민국재향경우회 회원 100여 명이 잇달아 중국 대사관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중국 불법 조업을 근절할 수 있는 실질적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고, 여전히 골머리를 앓는 이슈로 남았다.


2015년:
美 우방국 정상 중 한국만 열병식 참석

2015년 9월 3일 중국 북경 천안문(天安門·톈안먼) 광장에서 '중국 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주년(전승절 70주년)' 기념식이 개막했다. 이날 중국은 병력 1만 2000여 명에 핵탄두 미사일 '둥펑-21D'과 전략폭격기 '훙-6K' 등 최신예 무기를 동원한 열병식을 열어 적대국을 향해 중국의 '군사굴기(軍事崛起·군사적으로 우뚝 선다는 뜻)'를 과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9월 3일 중국 북경 천안문 성루에서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전 대통령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이어 시진핑 주석의 오른쪽 두 번째 위치에 자리하고 열병식을 참관했다. 미국 우방국 가운데 미국과 패권 경쟁하는 중국 열병식에 참석한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었다. 시 주석 역시 "한국 대통령은 가장 중요한 손님으로 잘 모시라"는 지시와 함께 별도 영접팀을 꾸려 박 전 대통령을 극진히 예우했다. 열병식에 30개국 정상이 참석했지만, 단독 오찬은 박 전 대통령에게만 대접했다.

사실 중국은 6·25 전쟁 때 적이었던 데다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고려하면, 박 전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 여부는 부담스러운 현안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중국이 우리나라 대외 교역액의 25%를 차지하는 최대 무역국이면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시 주석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다. 시 주석도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의식한 듯 북한 대표로 참석한 최룡해를 자신의 오른쪽 가장 끝에 배치했고, 박 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자신과 가까이에 배치했다. 이는 1954년 중국 열병식에 김일성이 마오쩌둥 전 주석과 함께 섰던 그 자리였다.

그 당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과 관련해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서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의 조화는 우리 외교의 핵심 과제"라면서 "박 대통령의 이번 선택은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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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최대 교역국' 중국… 높은 경제 의존도

우리나라와 중국 간 지난해 총 교역 규모는 약 2114억 달러로, 우리나라에 중국은 1위 교역국이다. 중국 다음으로 높은 미국과의 교역 규모는 약 1096억 달러로, 한-중간 교역 규모가 한-미보다 배가량 많다.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국이 중국이면서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 우리나라다. 지난해만 해도 우리나라가 중국을 상대로 약 374억 달러의 무역 흑자를 봤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관광객의 46.8%는 중국인(약 806만 명)이었다. 외국 관광객 2명 중 1명은 중국인인 셈이다. 중국에서도 한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다. 지난 2015년 기준*으로 1년간 우리 국민 약 444만 명이 중국을 찾았는데, 방중 관광객 중 한국인의 비중은 17.1%로 가장 컸다. 이렇듯 한 해 경제 교류 성과는 한-중 관계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중 교류에 차질이 생겼을 때 양국 모두 경제적 타격을 입을 만큼 서로 간 경제 의존도가 높다.
*지난해 2월 이후 중국 당국이 관광 통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왼쪽부터)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조선DB

아울러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전개한 양국은 때때로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에 함께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일본 내 짙어지는 우경화 경향,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한 교과서 발간, 우익 정치인들의 망언 등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정권을 잡은 이후 일본의 역사 왜곡 정도가 심해지는 것과 관련해 양국은 공개적으로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 더 나아가 중국은 일본 역사 왜곡에 대한 한-중 공동 대응 결과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을 주도했다. 각각 재개관 비용으로 1조 1000여억 원과 7억여 원이 들었는데, 중국이 전액 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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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중국은 대북 정책에 있어 공통된 행보를 걷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북한은 지난해 22번의 미사일 시험 발사에 2번의 핵 실험을 했다. 올해도 지난 9월 3일 '6차 핵 실험'을 비롯해 9월 15일까지 미사일을 17번 시험 발사했다. 북한의 잇따른 도발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다. 올해 마련된 대북 제재 결의안 2375호에는 북한의 섬유제품 수출 차단과 북한 해외 노동자 노동 허가 금지 등이 포함됐다. 미국과 EU, 일본 등은 유엔 제재안보다 더 강력한 독자 대북 제재안을 채택하면서 '북한 고립 작전'에 앞장서고 있다.

반면, 중국은 유엔 대북 제재 결의에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뒤로는 북한과 무역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에 공급하는 원유량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을뿐더러 몰래 북한으로부터 석탄과 수산물 수입을 재개하고, 북한에 미사일 개발에 사용되는 자재를 팔고 있다.

중국 장쑤성에서 2017년 3월 7일 한 주민이 문 닫힌 롯데마트를 바라보고 있다. 롯데마트 정문에 '소방안전조치 개선이 필요하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AFP 연합뉴스

중국은 또 북한 압박을 위한 우리의 움직임을 두고 경제 보복으로 맞섰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7월 8일 한-미 동맹에 근거해 방어용 무기체계인 사드(THAAD)를 도입했다. 중국은 사드 레이더가 북한 전역은 물론 중국 일부 영토까지 감시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발했다. 우리 정부는 사드는 자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임시 조치이며 중국 쪽 탐지는 불가한 위치인 경북 성주 야전에 배치했음을 거듭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활동을 위축시킬 목적으로 반덤핑 관세를 물린다거나 전방위적 세무조사를 시행했다. 영화·TV·광고 등 부문에서 한국 연예인 출연과 한국산 제품 판촉을 제한하는 등 이른바 '한한령(限韓令, 한류 금지령)' 또는 '금한령(禁韓令)'을 내렸다. 단체 한국 관광을 금지했다. 이러한 중국의 불합리한 ‘사드 보복’은 16개월간 이어졌고, 이로 인한 피해 규모를 공식적으로 산정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1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KDB산업은행경제연구소와 현대경제연구원에서 경제적 손실 규모를 각각 22조 4000억여 원과 8조 5000억여 원으로 추정한 바 있다. 관련 기사▶

최근 한-중 외교 당국은 한반도 사드 배치로 비롯된 갈등을 더는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교류 정상화를 발표했다. 우리 측이 사드 추가 배치를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과 미국 미사일 방어체계(MD)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 한·미·일 안보 협력을 군사동맹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는 것 등 이른바 '3불(不)' 입장을 밝혔고 중국 측이 이를 받아들였다. 양국은 경색된 경제 교류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새로운 대북제재 결의안 만장일치 채택
中의 대북제재 '구멍'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2017년 7월 6일 독일 베를린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한-중 정상회담을 열고 있다. /조선DB

양국이 사드 갈등을 봉합했다고 표명했지만, 북한에 대한 공조가 원활할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중국을 향해 대북 문제 해결에 더 나서줄 것을 요구했을 때 시 주석은 "지금껏 북한과 '혈맹(血盟)'의 관계를 맺어왔고 그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관련 기사▶

이 밖에도 중국의 '제품 베끼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식품과 전자제품, 화장품, 방송·게임 콘텐츠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 제품을 대놓고 표절하고 있다. 부여·고구려·발해 등 중국 국경 내 벌어진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는 프로젝트인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발발한 역사 인식 차이 역시 해소되지 못했다. 언제든 한-중 관계가 틀어질 수 있는 요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다.

"중국 방향 탐지 못하게 사드, 서쪽 산 밑 배치"
막 내린 사드 갈등


□ 참고 외교통상부·한국관광공사·KOTRA·한국무역협회
□ 그래픽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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