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땅, 땅… 세상을 바꾼 헌재의 판결

구성=뉴스큐레이션팀 정영민
입력 2017.02.10 08:17

민주주의의 역사와 함께 한 헌재의 역사


헌재 재판관들은 무슨 일을 할까?

/조선DB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재판관은 총 9명이다. 국회가 3명, 대법원장이 3명, 대통령이 3명을 지명하여 최종 임명은 대통령이 한다. 헌재 소장은 9명의 재판관 중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재의 권한은 총 5가지다. ①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심사하는 '위헌법률심판', ② 대통령·국무총리 등의 파면을 결정하는 '탄핵심판', ③ 정당의 해산을 명할 수 있는 '정당해산심판', ④ 국민의 기본권 침해를 심판하는 '헌법소원', ⑤ 국가기관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권한쟁의심판'이 그것이다. 다수결이 심판의 기본 원칙이지만, ①~④의 심판 청구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재판관 9인 중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 '위헌'과 '헌법불합치'는 어떻게 다를까?
헌재는 법률의 위헌 여부에 대해 합헌(合憲), 위헌(違憲), 한정합헌, 한정위헌, 일부위헌, 헌법불합치, 입법촉구 등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각각 판결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합헌
헌법의 취지에 맞음

위헌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 것으로, 법률 전체 또는 해당 조항이 무효가 됨

한정 합헌
법률 조항이 부분적으로 헌법에 위배될 때 헌법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한정해 해석하는 것

한정 위헌
다의적(多義的)으로 해석이 가능한 법률 조항에 대해 의미를 한정해 위헌 결정을 하는 것

일부 위헌
법률의 한 구절이나 어귀 등 일부에 대해서만 위헌 결정을 내리는 것

헌법불합치
사실상 위헌을 뜻하지만, 법의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개정 때까지 법을 존속시키는 것

입법 촉구
장래에 위헌이 될 소지가 있으므로 법 개정을 촉구하는 것

헌재 29년, 세상을 바꾼 그들의 판단

올해 29살이 된 헌법재판소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헌재는 그동안 28,990여 개의 사건을 처리했다. 지난 한 해 동안만 처리한 사건이 2,000여 건에 가깝다. 그리고 29년간 '위헌' 판결이 내려진 사례는 1,425건에 달한다. (수치: 2016년 기준)


동성동본 금혼 '헌법불합치'
"혼인에 있어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

(좌) 1996년, 성균관 유림대표 500여 명이 동성동본 혼인 허용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우) 1997년, 동성동본 부부들에 대한 혼인신고 접수 시작. /조선DB

성(姓)과 본(本)이 같은 남녀의 혼인을 금지하는 '동성동본 금혼'은 고려시대 성리학이 도입되며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법이다. 이들 남녀는 동거하며 사실혼의 관계에 있더라도 혼인 신고를 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이 같은 사람과 교제하거나 결혼하는 것을 꺼렸다. 당시 대중가요에서 동성혼을 반대하는 취지의 노래가 나오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시대의 큰 이슈였다.

민법의 동성동본 금혼 조항은 1997년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으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해당 조항은 1999년 1월 1일부터 효력을 상실해 동성동본 부부의 혼인신고가 가능해졌고, 2005년부터 민법상에서 금혼 규정이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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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전심의 '위헌'
"심의제는 헌법에 금지된 사전 검열제도와 마찬가지"

(좌) 영화 검열을 상징하는 사진. (우) 1996년, 여야 의원들이 영화의 폭력·선정성 장면을 보며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DB

우리나라의 영화 검열은 일제시대부터 본격화됐다. 1960년대에는 영화 제작 전 시나리오와 각본을 승인받고, 제작 완성 후 재심사하는 3중 검열 제도가 법에 명시됐다. '가위질'로 표현됐던 당시의 영화 검열은 영화 중간중간의 내용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안기부, 국방부 등에 의한 영화 사전검열은 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됐다.

영화 검열에 대한 헌법소원은 대학생 등으로 이뤄진 젊은 영화인 집단에 의해 제기된다. 사전심의를 거치지 않고,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오!꿈의 나라'를 불법 상영한 영화사 대표가 기소된 것이 계기였다. 헌재의 위헌 결정 이후 영화의 사전 심의는 폐지되고, 현재와 같은 상영 등급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부 제한된 장소에서만 상영할 수 있는 '제한상영가' 등급이 존재하는 탓에, 종종 논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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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 '합헌'
"강한 범죄억지력이 있으며, 폐지는 국민 정서에 부합하지 못함"

(좌) 2004년, 종교인연합 대표들이 사형제도 폐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우) 2010년, 사형제도 합헌 판결 직후 종교·인권·시민단체가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조선 DB

우리나라에서 시행된 첫 사형은 1949년 살인범에 대해서다. 이후 군사정권 시대를 거치며 사형을 당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1997년 12월 30일 이후로는 형 확정만 할 뿐 실제 사형은 집행하지 않고 있다. 국제적으로도 한국은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사형제도는 지금까지 두 번이나 헌재의 심판대에 올랐을 만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였다.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들지만, 존치론자는 인면수심의 범죄자에 대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헌법소원은 1996년과 2010년 제기됐는데, 헌재는 각각 7:2와 5:4(찬:반)로 사형제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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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가산점 제도 '위헌'
"평등권 및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

(좌) 1999년,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헌재의 군 가산점 위헌 결정에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우) 여성부 장관과 국방부 관계자가 군 가산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 /조선DB

'군 가산점'은 공무원이나 공기업 입사 시험, 일정 규모의 이상의 기업 채용 시 제대 군인에 대해 만점의 5% 이내로 가산점을 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특히 1~2점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1998년, 7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군 가산점 때문에 탈락한 사람들에 의해 헌법 소원이 제기됐다. 이 중에는 여성은 물론 장애가 있어 군 복무를 하지 못한 남성들도 있었다. 이에 헌재는 1999년, '공직자 선발에 있어 능력주의를 기초하지 않은 것은 헌법 위반'이라며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해 위헌 결정을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군 가산점 제도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위헌 결정 이후에도 군 가산점을 부활시키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는데 번번이 무산됐다. 남녀를 불문하고 갈수록 취업이 어려워지는 오늘날에는 군 가산점 부활이 여혐·남혐을 부각시키는 주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국방부는 군 복무 기간에 대해 학점을 주는 제도를 추진해 논란이 일었다.

▷관련기사 "공무원시험 군필가산점 위헌"… 환영 불만 엇갈려

과외금지법 '위헌'
"국민의 기본권을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침해"

(좌) 1980년, 서울의 학 중학교에 붙은 불법 과외 금지 공고문. (우) 과외금지조치 이후, 오피스텔에서 이뤄지는 불법 과외가 성행했다. /조선DB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표한 '7·30 교육개혁조치'에 따라 재학생의 과외 교습 및 입시 목적의 학원 수강이 전면 금지됐다. 이때 단속반까지 운영하며 과외를 강력히 규제했고, 위반했을 때는 형사처벌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아 과외가 음성적으로 성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1981년에는 예·체능계 과외 허용, 83년에는 하위권 학생들의 보충수업 허용, 84년엔 고3 학생들의 겨울방학 과외 허용 등으로 조금씩 규제를 완화하기에 이르렀다.

'과외금지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건 2000년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나면서부터다. 하지만 헌재는 고액 과외에 대해서는 여전히 처벌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었다.

신행정수도법 '위헌'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것은 오랜 전통을 지닌 관습 헌법이므로,
법률을 통해 바꿀 수 없음"

(좌) 신행정수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헌재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우) 충주권 주민들이 헌재 결정을 규탄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조선DB

2002년 당시 야권의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선거공약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내세웠던 것이 '신행정수도법'의 시작이었다.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반 '신행정수도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충청남도 연기-공주 지역에 신행정수도 입지를 확정했다. 그러자 서울특별시 소속 공무원들이 헌재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에 헌재는 '관습법'을 이유로 들어 신행정수도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에 반발을 제기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헌재 판결 이후 행정수도 추진은 전면 중단되고, 일부 부처만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로 이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관련기사 헌재, '수도이전 특별법' 위헌결정


호주제 '헌법불합치'
"양성평등 및 인간존엄 원칙에 위배"

(좌) 200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호주제 폐지 반대 전국 유림 궐기대회'. (우) 호주제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환호하는 여성단체 대표들. /조선DB

일제시대 때부터 우리나라 가족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호주제(戶主制)는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종속되어 있으며, 남성 중심으로 호주 승계 순위를 정해놓은 법이었다. 여성의 경우 혼인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혼인 후에는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 사후에는 아들의 호적에 올라야 했다. 이러한 법은 여성을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것과 더불어, 남아선호 사상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됐다. 이에 여성단체 및 시민단체들의 호주제 폐지 운동이 꾸준히 벌어졌다.

2003년,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고 헌재는 5번의 변론 끝에 헌법불합치 결론을 내렸다. 호주제는 2008년 완전히 폐지됐고, 대신 가족 구성원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관계등록제가 시행됐다.

▷관련기사 헌재 "헌법 불합치"… 시한부 선고받은 '호주제'


친일파 재산환수법 '합헌'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선언한 것으로 입법 정당"

2005년 정부가 제정한 '친일파 재산환수법'에 대해, 그 후손들이 연좌제 금지 등의 이유를 들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친일파 재산환수법'은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친일행위로 축적된 재산에 대해 국가에 귀속시키도록 한 법이다. 이에 헌법재판소는 친일행위를 규명하고 그 재산을 공적으로 회수하는 것은 헌법의 의무이며, 친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입는 '연좌제'에 해당하는 사안도 아니라고 밝혔다.


긴급조치 1·2·9호 '위헌'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해 헌법에 위배"

(좌) 1974년 당시,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해 적발된 사람들. (우)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오종상씨(오른쪽)가 무죄 판결 후 기뻐하는 모습. /조선DB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기반으로 탄생한 '긴급조치 1·2·9호'는 2013년에 이르러서야 위헌 결정을 받았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비판한 자를 영장 없이 구속해 징역 15년 이하의 처벌을 하도록 한 것, 긴급조치 2호는 이들을 적발하기 위해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며, 긴급호치 9호는 대학생들의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조치다.

긴급조치 1호에 대한 위헌 결정은 헌재 이전에 대법원에서 먼저 선고됐다. 2010년, 유신시절 당시 버스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해 3년간 징역살이를 한 오종상 씨에 대해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후 헌재는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만장일치로 위헌 결정을 했다. 이로써 故 장준하 선생, 인명진 목사 등이 39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아냈으며, 긴급조치로 인해 범죄자가 됐던 많은 이들이 한을 풀었다.

▷관련기사 긴급조치 1·2·9호 만장일치 違憲 결정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폭력을 행사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 함"

(좌) 2014년, 통진당 해산 결정 이후 눈물을 흘리는 이정희 전 대표. (우) 텅 빈 통진당 사무실에서 발견된 파쇄 문서. /조선DB

헌재가 헌법 절차에 따라 정당을 해산시킨 최초의 사례다. 당시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원이었던 이석기 내란음모 사태가 도화선이 되었으며, 2013년 11월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통과시켰다. 헌재는 409일 만에 재판관 8 대 1의 의견으로 통진당을 해산시켰다. 이후 통진당 소유의 모든 재산은 국고로 귀속되었으며,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도 영원히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또한, 해산된 통진당과 같거나 유사한 강령을 기조로 하는 새로운 정당의 창당도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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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통죄 '위헌'
"국가가 법률로 간통을 처벌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

(좌) 2008년 간통죄로 연행되는 탤런트 옥소리와 내연남, (우) 2016년부터 공개적인 불륜 사이로 지내고 있는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 /조선DB

우리나라의 간통죄는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남성이나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 성립되는 범죄 행위로, 1953년 제정됐다. 1953년 이전에는 유부녀에게만 간통죄를 적용하다가 1954년부터는 남녀 모두를 처벌하는 쌍벌제로 바뀌었다.

간통죄는 1990년, 1993년, 2001년, 2008년, 2015년 총 5차례 헌재의 심판을 받았다. 헌재는 앞선 4번의 심판에서는 간통죄에 대해 합헌, 2015년에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들어 위헌 결정을 내렸다. 2008년까지 간통죄 합헌을 고수했지만, 헌재 내에서도 사회 인식의 변화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개인보다 가정의 보호가 우선이라는 이유로 간통죄를 유지했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폐지에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어찌됐건, 말 많고 탈 많았던 간통죄는 헌재의 위헌 결정 이후 62년 만에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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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특별법 '합헌'
"자발적 성매매라 하더라도, 성을 상품화하고 성범죄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을 조장"

(좌) 2011년, 성매매여성들이 법 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우) 성매매특별법 합헌 결정이 나자 눈물을 흘리는 여성. /조선DB

성매매를 알선하고 성을 파는 행위를 한 자(성매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성매매특별법' 또한 헌재의 단골 손님이다. 성매매특별법에서 강요에 의해 성매매를 한 여성은 피해자로 보고 처벌하지 않지만, 자발적 성매매 여성은 처벌 받는다. 지금까지 8번 헌재의 심판을 받았지만 모두 '합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앞선 7번의 심판에선 단 1명의 재판관 만이 위헌 의견을 냈으나, 가장 최근인 지난해 판결에선 위헌 의견이 3명으로 늘었다.

2016년의 헌법 소원은 성매매 여성이 직접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례적이다. 이전의 것들은 대부분 사창가의 포주가 위헌을 문제 삼았다. 13만 원에 성매매를 하다 적발된 해당 여성은 "성매매가 아니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며 기본권을 침해 당했다고 호소했다. 헌재의 일부 재판관 역시 이 여성의 의견에 동의하며 '성매매의 형사처벌이 오히려 음성화를 부추긴다'고 했지만, 헌재는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최종 합헌으로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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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합헌'
"언론인과 사립학교 관계자를 포함시킨 것은 차별이라 보기 어렵다"

(좌) 2016년,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공무원들이 피켓을 들고 실천을 다짐하는 모습. (우) 헌재 앞에서 한국농축산연합회 사무총장이 5만 원어치 한우를 들어 보이고 있다. /조선DB

공직사회의 기강을 다잡기 위해 부정청탁이나 뇌물 수수를 금지하는 법안(일명 '김영란법')은 2012년 처음 발의됐을 때부터 일부 집단의 반발이 거셌다. 대상자와 처벌 범위에 대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친 뒤, 3년여 만에 겨우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그 다음엔 적용 대상을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까지 포함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한변호사협회와 기자협회 등은 '김영란법'에 대해 "민간인인 언론사 임직원과 교직원을 포함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하지만 헌재는 위헌 논란이 있었던 조항들에 대해 모두 '합헌' 결정을 내렸다. 특히 우선적으로 특정 직업군을 포함한 것은 차별이 아니며, 배우자의 금품 수수에 대해 처벌하는 것도 연좌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헌재의 판결 이후 농축산업계에서는 유감 표명을 했다. '김영란법'은 지난해 9월 28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관련기사 김영란법 등장부터 헌재 '합헌' 결정까지

사법고시 폐지 '합헌'
"8년간 유예기간 …직업 선택권·평등권 등을 침해하지 않음"

(좌) 2015년, 서울대 정문 앞에서 사시 수험생들이 사시 존치를 주장하며 삭발식을 하는 모습. (우) 2015년, 로스쿨 재학생들이 사시 존치를 반대하며 집단 퇴학서를 제출하고 있다. /조선DB

조선시대 및 일제강점기에도 과거시험이 있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사법시험(이하 사시)'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부터다.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사시는 한때 신분 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부작용도 낳아 수많은 '고시 낭인'들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도입된다. 한국에 로스쿨이 설립되면서 사시는 8년 뒤인 2017년 이후부터 폐지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시 폐지론자와 존치론자의 입장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고, 사시를 준비해 온 고시생들은 사시 폐지를 2년여 앞두고 헌법 소원을 제기한다. 그러나 헌재는 충분한 유예기간이 있었고, 고시생들의 로스쿨 입학이 제한되지 않으므로 사시 폐지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54년간 존치된 사시는 올해 12월 31일 자로 사라지게 됐다.

▷관련기사 헌재 "사시 폐지는 합헌"...사시, 2017년 54년만에 폐지 확정


헌법재판소는 국민의 기본권과 인권에 근거해 법률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실제로 헌재가 29년간 내린 결정들을 과거부터 훑어보면, 평등·존엄·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이 점차 신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인해 몇 십년 만에 죄를 벗은 사람들도 있다. 물론 헌재의 결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계속해서 논란이 되는 사안들도 적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재의 탄핵 심판 시계가 촉박하게 흘러가고 있다. 찬성과 반대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사안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가오는 헌재의 결정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것이며 후손들에 의해 평가받게 될 것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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