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300만 원씩 주는 나라, 그곳은 유토피아일까?

구성=뉴스큐레이션팀 정영민
입력 2016.06.14 08:02 수정 2016.06.14 08:43

실패로 끝난 스위스의 '300만원 실험'


스위스에서는 지난 5일 '기본소득(Basic Income)' 도입을 두고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근로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매월 일정 수입을 준다고 하여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해당 법안의 경우 모든 성인에게 조건없이 월 2500스위스프랑(한화 약 300만원),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월 650스위스프랑(약 67만원)을 지급하자는 것이 골자였다.

지난 5일 실시된 스위스의 '기본소득 도입' 국민투표에서 시민들이 투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스위스 국민 77% "공짜 돈 싫다"

법안은 스위스의 민간단체 BIS(Basic Income Switzerland) 주도로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됐다. 이들은 연금이나 실직수당 등 기존의 복지제도를 축소하는 대신, 노동하지 않고도 기본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주장했다. 현재 스위스에서는 12개월 이상 세금을 꾸준히 내기만 하면 실직 후 2년간 월급의 70~80% 수당을 받을 수 있는 등 실직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매우 잘 되어 있다.

그러나 스위스 국민들은 한국에서 '300만원 법안'이라고 알려진 '기본소득 지급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투표자의 77%, 한마디로 국민 10명 중 8명가량이 나라가 주는 공짜 용돈을 거부한 셈이다. 그 와중에는 23%의 찬성 의견도 있었다. 찬성론자 입장에선 다소 아쉬운 결과이지만, 법안을 제안한 BIS는 "기본소득 이슈를 주변 선진국으로 확산시킨 것만 해도 목적 달성"이라고 자평했다.


월 300만원 준대도 싫다는 쪽이 77%
/연합뉴스

스위스의 국민투표, 어떻게 이뤄졌나?

스위스에는 '국민제안'이라고 하여 1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등록하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BIS가 기본소득 지급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건 2013년 10월이었지만,  연방정부와 연방의회에서 안건 검토 과정을 거치는 데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1848년 연방헌법에 따라 직접 민주주의를 채택한 스위스는 국민들이 나라의 주요 안건을 결정하는 데 수시로 참여한다. 169년간 총 606개의 안건에 대해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스위스 국민에게 300만원이란?

우리나라에서는 '월 300만원'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인 스위스에서 300만원은 큰돈이 아니다. 스위스 국민들의 평균 월급은 월 700만원 정도, 최저임금은 한국의 2배가 넘는 1만 4천원이다. 맥도날드 햄버거 세트를 먹으려 해도 1만원이 훌쩍 넘는 돈을 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BIS에서 처음부터 2500스위스프랑 (3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못 박은 건 아니다. 다만 기본소득이 그 정도는 돼야 스위스에서 기초 생활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홍보한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복지 천국' 스위스, 어떤 나라인가?


각종 지표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스위스는 세계에서 인정한 살기 좋은 나라다. 인구가 800만명에 불과한 유럽의 소국(小國)이지만, 국민소득을 비롯해 경제·복지·행복 등 최근 발표된 모든 지표에서 상위권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런 나라에서 국민들이 '삶의 질을 더 높이기 위해' 기본소득을 제안했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찬성과 반대 입장을 각각 알아보자.

'기본소득' 도입 찬성론자들의 주장

스위스의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단체인 BIS 회원들이 종이박스로 만든 로봇 의상을 입고 시위하는 모습. 이들은 로봇 퍼포먼스를 통해 일자리 부족 시대에 기본소득이 필요함을 표현하고 있다. /BIS 홈페이지
"로봇 시대, 생계를 임금에만 의존할 순 없다"

알파고의 등장 이후 많은 이들이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머지 않은 미래에 인공지능이나 자동화 기계들이 우리 일자리의 일부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건 예고된 미래다.

25년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하며 로봇의 진화를 지켜본 베스트셀러 '로봇의 부상(Rise of the Robots)' 저자 마틴 포드는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직업까지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면서 "의학·법조·언론 분야에서도 이미 직업 파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기사 더보기

'기본소득 지급' 찬성론자들의 주장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BIS에 따르면, 기본소득은 인간의 인권과 직결된 문제다. 일자리를 잃어 소득이 사라지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는 건 침범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이다. 또한 '먹고 살기 위해' 질 낮은 노동이나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BIS는 기본소득이 앞으로 발생될 대량해고와 저임금, 소득 불안정 같은 현재 노동시장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비를 위한 소득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노동을 통한 소득이 사라지면 생산과 소비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바뀔 수밖에 없다. 자동화로 인해 재화의 생산 속도는 더 빨라지지만, 안타깝게도 일자리 축소로 이를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사라진다. 무인 자동차나 각종 첨단 제품이 생산돼도, 이를 소비할 여력이 없다면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찬성론자들이 사회와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고 믿는 이유다.

기본소득은 또 점차 심해질 소득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도 꼽힌다. 일차적으로 기계에 대체될 직업군은 단순 노동인데, 그렇게 되면 이미 저임금인 근로자들의 빈곤이 더욱 극대화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기계에 대체될 가능성이 낮은 금융·법률 등 고소득 근로자와의 임금 격차도 더욱 벌어진다.


[트렌드 돋보기] '일자리 창출'이라는 환상

'기본소득' 도입 반대론자들의 주장

스위스 화폐인 스위스프랑. /조선일보 DB
"막대한 재정부담 감당할 수 있나"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재원 마련 문제다. 스위스 정부 역시 기본소득 지급 법안이 제출되자 "위험한 실험" "유토피아 같은 환상"이라는 비판 의견을 냈다. 스위스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월 300만원 기본소득 지급안'이 시행될 경우 필요한 재원은 연간 2080억 스위스프랑(약 250조원)으로, 현재 지출액인 670억 스위스프랑의 3배에 달한다. 이런 막대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 증세는 물론, 다른 사회복지 비용을 줄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블룸버그의 칼럼니스트 메건 매커들은 미국의 예를 들어 기본소득에 대해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되기 어려운 시나리오"라고 꼬집는다. 그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매달 1000달러(한화 약 116만 4000원)를 전 국민에게 준다고 가정하면, 1년에 미국 연간 예산의 70%인 약 2조7007억 달려가 필요하다. 그는 그러면서 "지원금 액수를 지나치게 작게 설정하면 티가 나지 않는다. 결국 보편적 기본소득은 기업가 정신을 자극하지도, 다른 복지 제도의 문제점을 완화하지도 못한다"고 결론짓는다. ▶기사 더보기

"복지 실패 겪었던 다른나라 전례 따를텐가"

일부에서는 과도한 복지 예산 지출로 국가부도 위기까지 갔던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 남유럽의 사례를 들어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그리스는 1981년 이후 "국민이 원하는 건 다 내줄 것"이라는 기조 아래 복지 정책을 확대했다. 대학을 못 간 고교생에 국비로 해외 유학을 보내주는가 하면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고 유로존 국가 중 가장 후한 연금제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퍼주시기식 복지'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에서도 긴축안 채택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유로존 전체를 곤란하게 만든다. 


복지 천국이라 불리는 북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은 2004년부터 10년 넘게 생산성 증가율이 1%대에 머무는 반면,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고임금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빠른 고령화가 이유로 꼽힌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원대한 계획으로 전 생애에 걸친 복지를 제공한 영국 역시 경기침체 시절 '영국병'에 시달렸다.


*영국병: 1970년대 영국인들의 근로의욕 약화로 인한 자발적 실업, 기업가 정신의 쇠퇴 등을 일컫는 말. 전 국민에게 결혼수당, 임신수당, 아동수당, 과부수당, 장례수당 등 전 생애를 보장하는 복지를 제공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노동에 대한 의욕이 저하될 것"

스위스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1이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국민들의 근로 의욕이 저하될 것"이라고 답했다. 근로 의욕이 저하되면 생산성이 떨어지고 결국 경제가 위축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2010년 글로벌 경제 위기 이후 영국은 직접 현금을 주는 복지를 줄이고, 국민들의 근로 의욕을 자극해 경제를 살렸다. 기업에게도 법인세 인하 혜택을 주어 일자리를 더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덕분에 영국은 재정 적자 감소와 실업률 하락이라는 상충되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 기사 더보기

그러나 노동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스위스 국민들의 특성상, 기본소득으로 인한 노동 의욕 저하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스위스는 실직자에게 제공되는 우수한 복지제도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유럽연합(EU) 평균의 절반(3.5%)밖에 되지 않는 국가다. 실제 스위스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받으면 일을 그만둘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응답자의 10%만이 "당장 그만둘 것"이라고 했으며 40%는 "계속 일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의 재분배라는 복지의 원칙에 위배"

기존의 복지는 복지가 필요 없는 사람의 세금을 걷어 복지가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부의 재분배'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즉, 부자들의 세금을 이용해 저소득층을 위한 제도를 만드는 식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이러한 복지의 원칙에 위배된다. 기본적인 생계 유지가 절실하지 않은 부자들에게도 똑같은 금액이 무조건 지급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까지 동등한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웃 나라까지 번진 기본소득 이슈

스위스의 기본소득 논란은 국민투표 부결로 일단락됐지만, 이웃나라에서 중요한 사회 이슈로 떠올랐다. 실제로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변형된 기본소득 제도를 논의 중이거나 내년 중으로 시행을 예고하고 있다.


실업률이 높은 핀란드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월 800유로(약 101만원)를 지급하는 대신 기존의 복지 혜택을 폐지하는 복지 일원화를 검토 중이다. 이를 위해 내년부터, 무작위로 선정된 1만여명의 국민에게 매달 500유로(66만원)~700유로(92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를 시범적으로 시행한다.

2017년부터 위터레흐트시를 비롯한 19개 지방정부에서 개인에게 월 972유로(약 128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실험을 진행한다. 돈을 받으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경우 인센티브를 추가로 제공해, 기본소득이 근로 의욕을 꺾는 요인이 되는지 증명에 나선다.

 4월 1일부터 만 25세 이상의 근로자에게 시간당 7.2파운드(약 12000원)를 지급하는 생활임금제를 도입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최저임금 제도를 보완하고 기본 생계를 보장하겠다는 목적이다. 생활임금은 연 평균 6.25%씩 무조건 인상되는데, 장기적으로 정부 차원의 복지 비용을 줄일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부의 움직임은 없지만, 인공지능과 같은 4차 산업을 이끄는 실리콘밸리에서 기본소득은 화제다. 이곳의 IT 전문가들은 일하고 싶어도 모두가 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꼽으며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본소득 실험, 한국에서도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노인연금'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통령 후보일 당시 '65세 이상 전(全) 노인에게 매달 20만원씩 주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노인 빈곤을 해결하겠다는 목적이었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에 가로막혔다. 박근혜 후보의 '노인 기초연금' 공약이 현실화되면 2060년에는 자식 세대가 세금을 81만원씩 더 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오면서 세대 갈등까지 불러일으켰다. 결국 최초의 공약은 수정되어, 현재 만 65세 이상 노인 중 경제 하위 70%에 해당하는 사람만 기초연금을 지급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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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연금, 소득 하위 70%만 20만원 지급‥나머지 차등 지급

성남시의 '청년배당' 사업

성남시는 올해부터 만 24세 이상 청년 거주자들에게 분기별로 12만5000원의 상품권을 지급하는 '청년배당'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소득 수준이나 취업 여부와 관계없이 만 24세가 넘는 모든 청년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제도의 일환이다. 도입 당시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 목소리가 높았으며, 당초 취지와 달리 상품권을 받은 청년들이 이를 현금을 받고 되파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청년배당 사업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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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기본소득' 논제를 처음으로 공론화시키고 국민투표까지 한 나라다. 국민들의 선택은 사전 여론조사에서 예측했듯 압도적인 반대였다. 그러나 투표자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몇 년 뒤에 다시 투표하게 될 것 같다"고 예상했다고 한다. 지금 당장은 무리지만 15~20년 뒤에는 기본소득 제도가 가능할 것 같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스위스처럼 모든 국민에게 300만원을 주는 형태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기본소득은 복지제도의 한 형태로서 실시되고 있다. 기본소득이 대량실업이 현실화 될 미래 사회를 유지하는 하나의 대안이라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재원 마련과 포퓰리즘 논란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스위스의 300만원 실험을 황당한 딴 나라 얘기로 여길 것이 아니라, 예상보다 빨리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에 걸맞은 복지 제도에 대해 점검이 필요하다.

*환율= 2016년 5월 평균으로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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