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그리고 모스크

취재=이스탄불·에디르네 어수웅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2016.04.22 08:18

오스만 문명·건축가 시난·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돔… 터키의 황금시대로 떠나본 시간여행

동양과 서양의 다리, 비잔틴 문명과 오스만 문명의 심장. 오랫동안 터키 이스탄불을 수식할 때 사용되어 온 비유들이다. 1700년 전 짓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360년), 보스포루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톱카프 궁전(1453년), 그리고 내부를 파란 타일로 가득 채운 블루모스크(1609년)….

셀리미예 1574년. 터키에서 단 하나의 완벽한 돔을 가진 모스크를 꼽으라면 이곳, 셀리미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보듬어 안는 직경 31.22m의 거대한 돔. 하늘을 찌를 듯 솟은 4개의 첨탑. 밤의 셀리미예는 아름다워 성스럽다. /한상무 작가

이스탄불을 처음 찾는 사람이라면 필견(必見)의 유적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세일 기간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번잡함, 맥락과 계통 없이 섞인 건축까지.

터키를 조금 더 미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경험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말하자면 이 글은 '터키여행 심화학습'에 해당한다. 키워드는 세 가지. 오스만 문명과 미마르 시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돔(Dome).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뀐 것은 1453년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승리. 16세기에 이르러 술레이만 대제 휘하의 오스만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아름다움이 정점에 이른 것도 그때였다. 미마르 시난(1489? ~1588)이 활약했던 시기도 그때다. 터키어로 건축가라는 뜻의 미마르는 시난에게 이르러 고유명사가 됐다. 서양에서는 '오스만의 미켈란젤로'로 불리지만, 정작 이 땅에는 코웃음이다. 모스크부터 수로교(水路橋), 하맘(터키 목욕탕), 미드라사(신학교), 투르베(사당) 등 400여 건축물을 지은 그를 어찌 성베드로 성당 돔 하나 지은 건축가와 비교하느냐는 것.

예술가로서 그의 욕망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단 하나의 돔을 완성하는 것. 많은 종교전통에서도 그러하듯, 원이나 구(球)는 하늘이며 신(神)의 상징이다. 인간의 사랑과 신의 사랑, 세속의 권력과 예술적 욕망이 '돔'에서 교차하던 16세기의 오스만. 이 글은 터키의 황금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연이 만든 기묘한 매력 터키
코란과 미니스커트가 공존하는 땅, 이스탄불

사랑을 찾아… 미흐리마 공주

승전의 상징 파노라마 박물관, 블루모스크… 오스만제국의 꿈 서린 이스탄불

내 이름은 미흐리마(1522~1578).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지배한 영웅, 술레이만 대제의 외동딸이죠. 내 아름다운 모스크를 봐요. 아버지는 나를 위해 이 모스크를 지었어요. 내 이름을 딴 미흐리마 자미(1570).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터키어로는 '자미'라고 부른답니다.

내 남동생 셀림 2세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죠. 하지만 동생은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질투했어요. 자기 모스크에는 4개의 첨탑(미나레트)을 하늘로 세워 올렸지만, 내게는 단 하나의 첨탑만을 허락했죠. 모스크는 신을 위한 사원이지만, 첨탑은 결국 인간의 욕망. 부질없지만 첨탑이 몇 개 있느냐가 바로 권세(權勢)랍니다. 셀림은 물론 그런 말을 인정한 적이 없죠. 하지만 난 알아요.

시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내 모스크를 지어 준 사람. 그는 최고였어요. 인간의 권력은 당대로 끝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죠. 시난은 3대에 걸쳐 궁정 건축가였어요. 아버지 술레이만, 남동생 셀림 2세, 그리고 그다음 차례였던 무라트 3세까지.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아버지는 내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죠. 내 배필은 예술가가 아니라 전사(戰士)여야 한다면서요. 아버지는 뤼스템 파샤와의 결혼을 강요했죠. 저 멀리 발칸의 크로아티아를 정복한 뒤 데리고 돌아왔던 사내. 그는 야망의 사내였죠. 그래서 더욱 아버지 팔 안에 묶어두고 싶었는지도. 하지만 나는 그가 싫었어요. 세상에 그렇게 못생긴 사내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는.

시난은 말없이 내 모스크를 지었어요. 다른 사내와 결혼한 자신의 사랑을 보는 기분이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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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흐리마 1570년. 술레이만 대제의 외동딸 이름을 딴 모스크. 돔의 3층 창문이 특징. /한상무 작가
시난은 묵묵히 기둥을 세우고 돔을 올렸죠. 첨탑은 명령대로 한 개만. 내 돔의 지름은 20.25m, 높이는 37m에 달해요. 작지 않죠. 하지만 더 큰 최고의 돔을 짓기에는 아직이었나봐요. 사원 내부에 걸리적거리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을 세워야 했고, 주변의 하프 돔(half dome), 쿼터 돔(quarter dome)이 건축학적으로 이 중앙의 중심 돔을 지탱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시난은 나를 위해 특유의 3층 창문을 돔의 둘레에 만들어줬어요. 돔에만 24개, 전체 다 합치면 모두 76개의 창문이죠.

내 사원 옆의 성벽이 보이나요. 미흐리마 자미는 16세기 이스탄불의 경계이자 표지였어요. 특히 유럽의 이방인들이 우리 제국의 국경을 넘을 때, 처음 만나는 모스크였죠. 이스탄불에는 모두 7개의 유명한 언덕이 있어요. 그중 7번째 언덕에 내 자미가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보고 경탄해야 했기 때문에, 내 모스크는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웠죠. 하지만 그런들 무슨 의미가 있나요. 좋아하는 남자와 살 수 없었던 여자에 불과한 것을.

악마의 총리… 뤼스템 파샤

내 이름은 뤼스템 파샤(1500~1561). 파샤는 터키어로 장군이란 뜻이오. 원래부터 내가 파샤였던 것은 아니라오. 나는 원래 크로아티아 출신. 술레이만 대제가 우리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나는 어린 소년이었소. 황제는 나를 이스탄불로 끌고 갔소. 그가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이었지.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의 아들들은 황제의 나라로 끌려가고. 물론 인정할 건 인정하겠소. 대제는 공정했고, 식민지의 아들이라도 야망과 재능을 동시에 갖추었다면, 마음먹고 키워줬으니까. 나는 총리대신까지 올랐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총리를 했지.

나를 ‘악마의 총리대신’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오. 시인들이 특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지. 내게는 야망이 있었다오. 서방의 끝에서 볼모로 끌려온 처지라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니겠소.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법. 나는 내 권력을 즐겼다오.

꺼림칙하지만 이 말도 해야겠소. 내가 나병 환자라는 소문 말이오. 미흐리마 공주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못난 자들의 비열한 수작이었지.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모두가 듣도록 큰 소리로 의사를 불렀지. 그리고는 홀딱 벗고 이가 버글거리는 내 몸을 보여줬소. 의사가 깜짝 놀래더군. 이렇게 이 많은 남자는 처음 본다며. 당신도 알겠지만, 나병 환자는 이가 없소. 그 무섭고 독한 나병은 이까지 다 죽인다고 알려져 있는 시절이었지. 의사가 오기 전에 내가 이를 내 몸에 투척했는지는 말하지 않겠소.

시난과 미흐리마의 사랑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소. 그는 예술적 재능은 좀 있는지 모르지만, 그건 사내의 야망은 아니지. 남자라면 모름지기 전장에서 적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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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스템 파샤 1562년. 미흐리마 공주 남편, 총리의 이름을 딴 모스크. 화려한 내부 장식을 자랑한다. /한상무 작가

내 자미(1562) 역시 시난이 지었소. 연적(戀敵)의 모스크를 지어야 했던 사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소. 단지 그렇게 요구했지. 신의 사원이 아니라 속세의 사원을 지으라고.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 내 모스크 내부에 장식과 문양의 타일이 이리도 많은 이유요. 이즈니크 타일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소. 오스만 제국 최고 품질의 도자기이자, 파랑·빨강·초록을 정교하게 결합한 타일이지. 나는 이즈니크 지역 군주에게 명령했소. 만들 수 있는 모든 타일을 다 가져오라고. 뤼스템 파샤 자미의 돔이 이렇게 작은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소. 높이는 22.80m, 지름은 15.20m.

내가 죽었을 때, 나는 1700명의 노예, 2900마리의 말, 1106마리의 낙타를 유산으로 남겼소. 남는 건 마음이 아니라 물질이고 재산이오. 내 신념을 아는 걸까. 이 땅의 모스크로는 거의 유일하게, 뤼스템 파샤 모스크의 1층은 지금 시장과 상점으로 들어차 있지. 하늘에서 내려다보더라도 뿌듯하오.

오스만의 영웅… 술레이만 大帝

서양사람들은 내 이름 앞에 The Magnificent를 붙이지. 그냥 황제가 아니라 대제(大帝). 내 이름은 술레이만(1494~1566). 전성기 내 영토가 어디까지 뻗었는지 알려주리다. 흑해 일대 유럽과 발칸 전체,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 아랍 전역, 그리고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의 러시아까지. 내가 한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내면 유럽 전체가 발칵 뒤집혔지. 내 재임기간, 오스만의 영토는 지구의 절반이었소. 우리 군대는 최고였지.

같은 시절 프랑스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난 이런 편지를 보냈다오. “나는 술탄들의 술탄이자 군왕들의 군왕. 짐은 지상의 군주들에게 왕관을 나누어주는 자이자, 이 땅 위 신의 그림자이니, 짐의 고귀한 조상들과 저명한 선조들이 무력으로써 정복하고 존엄한 황제인 짐 또한 불꽃 같은 양날검과 승리의 군도로 정복한 백해와 흑해, 루멜리아와 아나톨리아, 카라마니아, 로마 지역, 둘카디르, 디야르바키르, 쿠르디스탄, 아제르바이젠, 페르시아, 다마스쿠스, 알레포, 카이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아랍 전 지역, 예멘 등지를 관장하는 술탄이며 황제이다.”

1299년 튀르크를 이어받아 건국한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 무슬림에게 10은 완벽의 숫자라오. 알고 있겠지만, 술레이만은 동방에서 가장 추앙받던 왕 솔로몬의 터키식 발음이라오. 신이 다윗에게 그랬던 것처럼, 솔로몬에게도 학식과 영감을 주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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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이마니예 1558년. 술레이만 대제의 모스크. 이스탄불 최대 규모다. /한상무 작가

나는 평생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뒀소. 첫째가 젊어서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가슴이 미어졌지.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소. 나는 그냥 황제도 아니고 대제니까. 어찌 필부처럼 마음을 드러내겠소. 그 대신 딸에게는 잘해주고 싶었지. 그 녀석의 이름을 딴 자미를 짓게 한 것도 그래서였소.

사위와 딸의 자미를 완성한 뒤, 내 모스크를 지었지. 그게 바로 쉴레이마니예 자미(1558)라오. 높이 53m, 지름 27.5m의 폭포 모양 돔, 그리고 뾰족한 얇은 첨탑. 역시 시난에게 지시했소. 이 모스크의 발코니는 모두 10개요. 내가 10대 술탄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모스크 옆에는 네 개의 메드레세와 의과대학, 말과 낙타, 그리고 마부의 숙소, 하맘, 숙소 등도 함께 짓게 했소. 이스탄불에서는 가장 크다오. 나는 대제니까.

예술을 찾아… 건축가 시난

내 이름은 시난. 미흐리마 공주와 뤼스템 파샤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술레이만 대제의 자미를 지은 자요. 술레이만 대제의 아들 셀림 2세를 위한 모스크를 건설한 자이기도 하지. 고백하겠소. 나는 셀림 2세가 아니라 나를 위해 이 모스크를 지었소. 내 평생의 사랑은 미흐리마였지만, 내 필생의 자랑은 셀리미예 모스크라오.

에디르네였소. 내가 셀리미예 모스크(1574)를 지은 땅은. 새로운 황제는 이스탄불보다 에디르네를 사랑했소. 이스탄불에는 더 이상 모스크를 지을 만한 땅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였소. 나는 깨달았소. 모스크와 함께 평생을 함께했던 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제는 좀 욕심을 부려도 그분께서 허락해주실 것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단 하나뿐인 돔. 이 안에 들어오는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감싸 안을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돔. 그러면서도 볼썽사나운 기둥을 가운데 쓰지 않고, 그 자체의 균형과 비례를 갖춘 돔. 내 평생의 꿈. 나는 감히 말하겠소. 셀리미예 모스크에서 그 꿈은 실현됐다고. 걸작(masterpiece)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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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미예 모스크 /한상무 작가

돔의 지름은 31.22m, 높이는 43.28m. 가장 큰 직경의 돔이오. 나는 셀리미예가 자랑스럽소. 8개의 기둥이 있지만, 잘 보이지 않을 거요. 내부가 아니라 외부 벽면 쪽으로 최대한 물러서게 지었으니까. 이스탄불은 지진이 많은 곳이라오. 거의 모든 모스크가 한 번씩은 무너져서 후세가 다시 지어야 했지만, 셀리미예 돔은 지금까지 무너진 적이 없소.

내가 말했나요. 돔은 하늘을, 신을 상징한다고. 이 돔 아래에서, 우리는 하나요. 황제 술레이만도, 농부도, 장사꾼도, 황제의 아들도, 남자도 여자도. 비록 내 사랑은 실패했지만, 나는 신에게, 그리고 예술에 떳떳하오. 터키에 오거든, 부디 내 분신을 잊지 마시길. 세상은 승리 만큼이나 아름다움도 소중하니까.

이슬람사원 뜻하는 '모스크'… '퀼리에'는 사원·신학교 포함한 종합단지

터키는 모스크의 나라다. 자선(慈善)을 으뜸 가치로 삼았던 오스만의 왕족과 고위 관료들은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사원을 지었고, 신학교와 무료 식당도 함께 지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종교인 탓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많다.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 퀼리에는 모스크와 부속 건물로 이뤄진 복합 단지다. 부속 건물은 이슬람 교육을 위한 신학교 메드레세, 정화(淨化)를 위한 세정 시설 사디르반, 수도자를 위한 숙소 탑하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식당 이마레트, 말과 마부를 위한 숙소 카라반사리, 죽은 사람을 모시는 투르베, 공중 목욕탕 하맘 등으로 구성된다. 자비를 베푼 자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이들 중 일부만 짓는 경우도 많다.

셸리미예 모스크 내부. /한상무 작가

'오스만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미마르 시난은 평생 모스크만 80여 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흐르마 모스크나 뤼스템 파샤 모스크 시절만 해도 '과정'에 있었지만,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거쳐 셀리미예 모스크에 이르러 '완벽한 돔'을 실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모스크 안에는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벽감(壁龕)인 미흐랍이 있고, 사제인 이맘이 설교를 하는 계단인 민바르가 있으며, 모스크 밖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첨탑 미나레트가 있다. 마이크나 스피커 등이 없던 시절, 사람이 직접 올라 큰 목소리로 기도 시간을 알렸던 장소다.

■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는 이스탄불. 이번 건축 기행에 등장하는 미흐리마·뤼스템 파샤·쉴레이마니예 모스크는 모두 유럽 지구에 있다. 신시가지가 아니라 구시가지 쪽이다. 뤼스템 파샤쉴레이마니예는 서로 걸어서 5분 거리. 미흐리마 모스크는 여기서 차로 15분 거리다.

시난 건축의 최고봉인 셀리미예 모스크는 이스탄불에서 유럽 방향으로 240㎞ 떨어져 있다. 출퇴근 시간을 피할 것. 안 막히면 2시간 30분 거리지만, 이스탄불 외곽은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다. 에디르네시(市)는 불가리아 국경과 불과 12㎞. 당시 오스만 제국 제2의 수도이자, 발칸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 이스탄불의 식당으로는 3곳을 추천한다. 우선 호텔 아카디아블루 9층의 ‘파인 다인 이스탄불’. 전망이 최고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바다와 소피아대성당, 블루모스크가 통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온다.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 멋진 정찬(正餐)인데도, 맥주 8터키리라, 메인 요리 역시 40터키리라 안팎이다. 1터키리라≒400원. finedineistanbul.com +90 0212 516 96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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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모스크 /한상무 작가

다음은 명소 갈라타 다리 앞의 ‘함디(Hamdi) 레스토랑’. 유럽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 앞에 위치한, 역시 전망 좋은 식당이다. 양, 소고기, 닭고기 등을 꼬챙이에 꿴 케밥이 훌륭하다. 메인 요리는 35터키리라 수준. hamdi.com.tr +90 212 528 0390


에디르네에서는 툰자 강을 내려다보는 수변 식당 랄레자르 레스토랑을 소개한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야외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고, 가격대 역시 합리적이다. 특산 요리는 간 튀김. 30터키리라 수준. lalezaredirne.com +90 284 223 0600.

■ 유적을 제외하면 전 세계 대도시와 동기화(同期化)된 이스탄불과 달리, 에디르네는 아직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가는 곳이 많다. ㎡당 역사 문화유산 비율이 터키 1위, 전 세계 2위. 에디르네 시청 건물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핑크빛 건물을 그대로 빼닮았고, 새로 복원한 유대인 예배당 시나고그도 매혹적이다.


■ 터키 항공(turkishairlines.com)은 인천-이스탄불을 주 11회 운항한다. 1800-8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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