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잠깐 乙에서 다시 甲으로

입력 2016.04.15 03:20

이들의 本業은 뭘까…
대부분 '정치인'이 아니라 '고액연봉 직장인'으로 보장된 4년 세월 누려
일에 너무 몰두해 過勞 입원 사례는 없어

최보식 선임기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라며 무릎 꿇고 큰절하는 장면은 뉴스를 탔지만, 후보들의 내밀한 '속 골병'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현장에 나가보니 저마다 심한 요통(腰痛)을 호소할 줄은 몰랐다. 사람 그림자만 비쳐도 자동 굽실거리며 90도 인사를 해댔으니 허리가 놀랄 수밖에 없다. 아쉬운 것 없이 살아온 인생에서 그런 식의 허리 근육을 쓸 이유가 없었다. 선거 운동 기간이 더 길었다면 병실에 드러누울 후보들이 속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끝났다. 영광의 당선자들은 잠깐 쇼를 했던 을(乙)에서 다시 갑(甲)으로 복귀할 것이다. 거의 빛의 속도로. 옷걸이를 넣은 것처럼 어깨가 올라가고, 목소리에는 위엄이 당당하며 허리는 다시 뒤로 젖혀질 것이다. 선거 동안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표 구걸을 했던 추레한 자신의 모습은 "언제적 얘기냐"며 금세 잊힐 것이다. 그게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언론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국민적 심판'이라고 분석했다. 정확히 짚었다. 하지만 역대 선거마다 그런 똑같은 분석이 나왔던 걸 기억해야 한다. 불과 4년 전 19대 때도 그랬다. 그때도 당선자들의 포부와 희망은 합창처럼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 뒤 어떠했는지도 생생하게 기억날 것이다. 그때 뽑힌 의원들이 이번 당선자들보다 수준이 훨씬 떨어져 국회를 '개판'으로 만들었을까.

선거에서 바뀌는 것은 정당 간 역학관계나 당내 권력 구도뿐이다. 어느 당이 몇 석을 더 차지했고 누가 부상(浮上)해 얼마나 권력을 잡았느냐를 정치가 바뀌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것도 바뀌는 것은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바뀌기를 원했던 '여의도판 정치 행태'는 선거 결과로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금배지를 달고 나면 하나같이 유구한 전통(傳統)을 자랑하는 '여의도 체질'이 된다.

그 체질은 당(黨) 지도부의 피리 소리에 따라 우르르 이리 가고 저리 몰려다니는 게 특징이다. 법안에 찬성하라면 찬성하고 반대하라면 반대하고 막말과 몸싸움을 시키면 또 그렇게 한다. 하지만 각자가 '헌법기관'이라며 위세를 보이는 데는 능하다. 장관이나 고위직 공무원들을 수시로 불러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하거나 호통치는 것도 잘한다. 이들의 본업이 무엇이고, 금배지의 밥값은 무엇으로 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분명한 것은 이들 대부분은 '정치인'이 아니라 '고액 연봉 직장인'으로 보장된 4년 세월을 잘 누린다는 점이다. 국민의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일에 너무 몰두해 과로로 입원했다는 사례는 아직 없었다. 그러다가 또 선거 때가 되면 "민심이 무섭다"며 사죄하고 읍소하며 골목을 돌아다닌다. 어쩌면 우리는 선거를 통한 이들의 구직 활동에 쭉 협조해온 셈이다.

지금껏 반복된 관찰과 경험은 이번 국회에도 많은 기대를 걸지 않게 한다. 이는 실망의 낙폭(落幅)을 줄이기 위한 세상살이 기술일 수도 있다. 기대가 너무 올라가면 떨어지는 추락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니 당선자들은 '국민을 위해 무얼 하겠다'고 제발 떠들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지켜지지도 감당해내지도 못할 것들이다. 선거 끝났으니 대놓고 저질 싸움판을 다시 벌이지나 않을까 걱정될 뿐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자신이 누리게 될 기득권을 향해, 자신들끼리 똘똘 뭉친 카르텔을 향해 이런 '칼'을 들이댄다면 한번 기대는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것에 비해 연봉과 수당이 너무 많고, 혜택은 너무 과하다. 이제부터 외부 민간기구에서 우리가 일한 만큼 객관적 평가를 해 연봉을 정해 달라, 우리끼리 봐주는 의원 품위와 윤리에 관한 징계도 그렇게 해달라. 독재 정권 시절 언로(言路)가 막혔을 때 만들어진 면책 특권은 포기하겠다. 여의도 의사당과 승용차 안에서는 서민들 삶을 피부로 느낄 수 없으니 한 달에 최소한 몇 차례 버스·지하철·택시 등 대중교통을 타는 규정도 만들겠다…."

지금 세상은 직장을 찾지 못한 청년들, 같은 일을 하고 절반의 임금도 못 받는 비정규직들, 임금피크제로 앉아서 연봉 삭감을 당하는 중년들, 줄 잇는 파산 대열에 서 있는 자영업자들로 넘쳐난다. 명색이 "서민을 대변하겠다. 머슴이 되겠다"며 선거 때 표를 구걸했으면 이런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거창한 정책의 나열보다 이런 사소한 것만 약속해도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 정당의 의석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정국을 주도할 게 틀림없다.

여의도는 세상의 변화 흐름과 동떨어진 외딴 섬이 돼서는 안 된다. 위에서 올라타고 내리찍고 호통치는 것만 갑(甲)이 아니다. 국민이 정치에 대해 기대를 접고 있는데도 귀 막고 눈감는 것도 갑이다. 이제 당선자들은 금배지 '갑'으로 곧 복귀할 것이다. 축하한다.


 


 

조선일보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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