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열등감'을 찍었다… 나도 그런 존재니까

곽아람 기자
입력 2016.04.09 03:00 수정 2016.04.10 16:48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 '동주' 등 저예산 영화로 잇따라 히트한 이준익 감독

"돈이 무서워… 망해도 작게 망하려고 블록버스터 안 찍어"

열등감은 인간을 가장 잘 보여줘
동주는 식민지로 인한 열등감에
주옥같은 詩 쓸 수 있었던 것

스타이건 괴물이건
시작은 열등의식의 반작용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환치하면
주변과 소통하기 어려워져

영화감독 이준익(57)은 인터뷰 약속을 잡은 지 세 시간 만에 전화를 걸어와 "내 인생사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으면 인터뷰를 안 하겠다"고 했다.

―인생사 이야기가 왜 싫은가.

"영화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거지. 인생사가 무슨 필요 있나? 아까는 엉겁결에 승낙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아닌 것 같다."

―관객 입장에선 감독 인생을 아는 것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다. 멜빌이 고래잡이 배 선원이었다는 걸 아는 독자가 '모비 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침묵하더니) 어쨌든 난 개인사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입 다물 거다."

닻을 올리기도 전에 암초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랄까. 쉽지 않은 대화가 될 것으로 예상하며 인터뷰 장소로 향했다. 이준익의 사무실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서울 충무로의 낡은 빌딩 5층에 있었다. 열 평 남짓한 공간은 휑뎅그렁했다. 철제 책상 하나와 책장 네 개. 날렵한 검정 재킷 차림의 이준익은 쾌활하게 "영화사 사무실이 삐까번쩍하면 '사짜'야. 원래 영화사란 '떴다방' 같은 거예요" 했다. 책상 뒷벽에 '동주'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5억원이라는 저예산에 흑백이라는 핸디캡을 안은 이 영화가 지난달 12일 개봉 24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00만명을 돌파했다.

이준익은 1993년 데뷔 이래 ‘왕의 남자’ 등 11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는 “감독은 시대를 정하고, 인물을 정하고, 그 인물을 상대하는 상대를 정하고, 그 두 인물과 연결된 다른 인물을 구성한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상을 포함한다”면서 “모든 작품은 만든 사람의 고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이미지 크게보기
이준익은 1993년 데뷔 이래 ‘왕의 남자’ 등 11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는 “감독은 시대를 정하고, 인물을 정하고, 그 인물을 상대하는 상대를 정하고, 그 두 인물과 연결된 다른 인물을 구성한다.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사상을 포함한다”면서 “모든 작품은 만든 사람의 고백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이진한 기자
"열등감은 나의 힘"

―'동주'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제작비도 적었고 개봉 당시 스크린 수도 384개밖에 안 됐다. 감독이 이준익이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성취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단 윤동주의 잠재력 덕이다. 그리고 이준익의 힘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제작 노하우라고 봐야 한다. 영화 '동주'는 1935~45년이 배경이다. 시각적 리얼리티를 구현하려고 세트를 지으면 제작비가 100억원을 넘어가는데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좇다 보면 100억 이상의 상업적 성취를 얻을 수가 없다. 시인의 삶에는 스펙터클이 없다. 시 자체가 스펙터클이라 영화에서 강하늘이 낭독하는 윤동주의 시를 내레이션 형식으로 들려주는 방법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의 잠재력이라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윤동주 시와 관련된 자신만의 기억이 있다. 빈폴 광고의 자전거처럼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있는 시'에 대한 영화가 나왔다고 하면 기대와 함께 염려도 크다. 내가 사랑하는 나만의 동주, '나만의 다마고치'가 이준익 영화로 해서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흑백영화가 가지고 있는 노스탤지어라는 서정성의 기대. 그런 염려와 기대의 과정이 관객들이 영화를 보게 되는 동인이라 생각했다. 그 계획이 온전히 관객들에게 전달됐기에 상업적 성취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동주'에서 이준익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 순정(純正)한 시인의 박제된 이미지에 열등감이라는 상처를 덧씌워 현실로 끌어낸다. 영화 속 윤동주는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고종사촌 송몽규와 자신을 비교하며 주눅 드는 인물로 그려졌다.

―당신 영화에서 열등감이란 주요한 키워드다. 전작 '사도'(2015)에서는 영조, '왕의 남자'(2005)에서는 연산군의 열등감을 파고들었다.

"열등감처럼 스스로를 정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심리는 없다. 많은 사람이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환치시킨다. 그게 주변과의 소통을 방해한다. 한 인간을 정직하게 보려면 그 인물의 열등감을 소중히 맞이해야 한다. 그걸 막는 건 승리주의자들의 과도한 폭력이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 장생의 호승심과 연산의 집착은 열등감에서 나온다. 윤동주의 경우 일제 식민지라는 시대적 배경이 주는 총체적 열등감이 송몽규라는 거울을 통해 표현된다. 그는 열등감을 에너지 삼아 주옥같은 시를 썼다. 유복하게 자라 좋은 학교 나온 윤동주가 열등감을 자각하지 않고 우월감으로 가득 찼다면 친일파가 되지 않았을까?"

―당신의 열등감은 무엇일까.

"엄청나게 많다. 스타이건 괴물이건 왕성한 에너지를 가진 모든 사람의 시작은 열등의식의 반작용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다. 고등학교 때 반 등수는 60명 중 항상 50 몇 번째였다. 학연, 지연, 혈연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빈민의 자식이다. 성장 과정에서 자연히 우월감보다 열등의식이 앞서지 않겠나.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젊은이였다. 눈앞에 닥친 과제가 있으면 그 과제를 성실함을 넘어서 과도하게 밀어붙여 온 고단한 인생의 연속이다. 내가 열등하다는 자각 때문에 부족한 지식, 경험, 안목 등을 주변의 말을 경청해 채우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스타 감독' 타이틀을 부여받은 거다."

―유명해진 지금도 여전히 열등감이 있나.

"당연히.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영화에 대해 무지하다는 열등감이 생긴다. 다른 감독을 볼 때도 그렇다. 내가 구현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 때문에. '베테랑'의 류승완 감독을 보면 '나는 왜 저렇게 통쾌하게 못 찍지? 내 영화는 왜 맨날 우울하지?' 짜증이 나는 거다. '암살'의 최동훈을 봐라. 영화 나올 때마다 보여주는 놀라운 스펙터클. 나는 노력해도 안 될 것 같다. 그런 열등감은 매일 있다."

―그게 극복이 안 되나.

"하고 싶은데 못 하는 거다. 한편으로는 극복해서도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그게 극복이 되면 오만한 인간이 되거나 남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존재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동주’ 촬영장에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오른쪽)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이준익.이미지 크게보기
‘동주’ 촬영장에서 윤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오른쪽)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이준익. /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독학으로 깨친 영화

'영화판을 밑바닥부터 다 아는 사람'. 이준익에 대한 영화계의 평가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이준익에 대해 "20대 때부터 전천후 경험을 쌓아 인생에서 거칠 게 없다. 한마디로 '영화인'이다"고 평했다.

그가 그렇게 꺼리는 인생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이준익은 세종대 미대 2학년을 중퇴했다. 일찍 결혼해 스물한 살에 아이 아빠가 되는 바람에 생계가 급했다. 일곱 평짜리 아파트에 월세 살며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25세 때인 1984년엔 광화문 정부 종합 청사에서 수위로 일했다. 밤 근무를 하면서 시사만평을 그려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사를 다짜고짜 찾아갔지만 거절당했다. 명보극장에 찾아가 "영화 간판을 그리고 싶다"고도 했지만 받아주지 않았다. 학원 강사를 하다가 잡지사에서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는 형이 "돈 더 주는데 있는데 올래?" 하고 물어본 게 '영화 인생'의 시작이었다.

1986년 합동영화사 선전부장으로 들어가 영화 포스터를 그리고 광고 문구 쓰며 간판도 디자인했다. 1987년 영화 광고 대행사 씨네시티를 차렸고 1993년엔 영화 제작·홍보·수입·배급사 씨네월드를 열었다. 감독으로 데뷔한 것도 그해. 아역 스타 이재석과 김민정이 주연한 어린이 영화 ‘키드캅’이다. 야심 차게 시작한 첫 영화는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관객 수가 2만1454명(서울 기준)에 그쳤다.

―영화 홍보를 하다가 왜 갑자기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나.

“모든 인간에겐 구심력(求心力)이 작용한다. 누구나 처음 태어나면 아웃사이더지만 인사이더가 되기 위한 구심력으로 나이를 먹어 가는 거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영화를 어떻게 마케팅할까 고민을 반복하다 보니 내가 광고하는 그 영화의 구심점에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독학으로 영화를 찍는 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영화는 집단 작업이다. 감독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촬영은 촬영감독에게 물어보면 되고, 시나리오는 작가 선임하면 되고, 연기는 배우가 한다.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어디 악기 연주하던가. 각자 연주하는 거고 나는 거기에 대해 오케이나 노만 하면 되는 거다. 찍으려는 영화의 목표가 분명하고, 내 의지를 잘 설명하고, 거기서 맺어지는 결과를 내가 수용만 하면 된다. 독학의 힘이라는 게 아카데미의 힘과 비교했을 때 그렇게 열등하지 않다.”

―1993년 ‘키드캅’ 실패하고 10년간 영화감독은 안 했다.

“대신 제작하고 수입했다. 감독을 안 한 건 자질이 없다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흥행도 나빴지만 나 스스로 작품에 대한 만족도도 부족했다.”

―2003년 ‘황산벌’로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감독이 없어서 그랬다. 시나리오를 개발해 의뢰했는데 몽땅 ‘빠꾸’ 맞으니까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하는 수 없이 내가 감독했다.”

―그런데 그 영화가 관객 270만명을 동원했다.

“그러게 말이다. 세상 일은 새옹지마(塞翁之馬)다. ‘키드캅’ 결과가 나빴으니 ‘황산벌’이 좋을 수 있었던 거다. 반성만이 개선의 조건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야기 세계에 대한 탐구력이 상승한 거다. ‘키드캅’은 할리우드 흉내 낸 거다. ‘나 홀로 집에’나 ‘구니스’ 같은 걸 따라 한 거다. 따라 한다는 게 그렇다. 타인이 만들어놓은 매뉴얼을 아무리 잘 습득해 열심히 한들 매뉴얼을 만든 사람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다. 매뉴얼을 만들지 못하면 타인의 매뉴얼에 구속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황산벌’은 레퍼런스가 없는 영화다. 내가 사극의 매뉴얼을 만들겠다는 의욕이 있었다. 전쟁물에 코미디를 시도한다는 건 종전에 없던 매뉴얼이다. 그게 성공한 거다.”

―결국 영화 제작하면서 외화 수입하던 10년간 배운 건가?

“그렇다. ‘메멘토’ ‘헤드윅’ ‘택시’ 등 약 50편을 수입했는데 외국 영화를 수입하다 보니 이상한 수치심과 모멸감이 생겼다. 돈 싸 짊어지고 가서 그들에게 영화 사겠다고 하는 게 참…. 관객들 돈을 또 그들에게 갖다주는 꼴밖에 안 되는 거다. 영화 수입하러 가서 한국서 왔다고 하면 ‘노스(North)냐 사우스(South)냐’ 하고 물었다. 우리를 모른다. 그게 짜증 나서 사극 찍은 거다. 우리에게도 너희 못지않은 비극이 있고, 전쟁이 있고, 왕이 있고, 광대가 있고, 혁명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준익은 “배우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배역과 나이가 맞는가이며, 둘째로 배우의 스케줄, 셋째로 연기력, 넷째로 이미지를 고려한다”고 했다. 왼쪽 사진은 ‘왕의 남자’ 촬영장에서 이준기·감우성과 이야기하는 이준익. 오른쪽은 ‘사도’ 촬영장에서 유아인과 함께.이미지 크게보기
이준익은 “배우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배역과 나이가 맞는가이며, 둘째로 배우의 스케줄, 셋째로 연기력, 넷째로 이미지를 고려한다”고 했다. 왼쪽 사진은 ‘왕의 남자’ 촬영장에서 이준기·감우성과 이야기하는 이준익. 오른쪽은 ‘사도’ 촬영장에서 유아인과 함께. / 사진작가 노주한 제공
관객 1200만 돌파한 ‘왕의 남자’

‘황산벌’로 주목받은 이준익을 ‘스타 감독’ 반열에 올린 건 2005년 개봉한 ‘왕의 남자’다. 왕과 왕을 풍자하는 광대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관객 1230만2831명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 영화 역대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6135명)를 눌렀다. 그가 감독한 영화 11편 중 가장 히트했다.

―그 영화가 그 당시 왜 그렇게 인기 있었을까.

“그게 참 신기한 일이다. 극장이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아마 광대 공길 역을 맡은 이준기 덕에 1000만명을 돌파했을 거다. 지금 송중기 때문에 난리라고 하던데 ‘예쁜 남자 신드롬’이 그때 시작된 것 아닐까.(웃음)”

―진실로 그렇게 믿나.

“사실을 얘기하는 거다. 영화감독은 진실을 모른다. 관객이 안다. 제작비도 많지 않고 거대한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1000만명이 되었다는 건 관객의 무의식이 반영된 거 아닌가. 관객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광대 정신, 즉 권력을 조롱하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영화를 소비시킨 잠재력 아닐까.”

―그 영화 순제작비도 41억5000만원으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왜 당신 영화는 항상 제작비가 적을까.

“돈에 대한 공포가 있어서 그렇다. 외화 수입하며 빚을 많이 졌다. 빚을 져본 사람은 빚이 영혼을 잠식한다는 걸 안다. 실패 경험이 많다 보니 흥행이 실패했을 때 돈에 대해 느끼게 되는 심정적 책임과 물리적 책임이 너무 힘들다. 돈이라는 게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연이 결부돼 있다. 때론 누군가의 생활비이기도 하고, 부모님께 드릴 용돈이기도 하고, 자식 학원비이기도 하다. 그 수많은 사연이 자본에 잠식당했을 때 오는 피해가 두렵다. 그래서 ‘망해도 적게 망하자’ 싶었다. 약간 비겁한 태도다.”

―‘왕의 남자’ 이후로 ‘사도’가 관객 620만명을 돌파하기까지 10년간 그럴듯한 히트작이 없었다. ‘노름판에서는 새벽이 올 때까지 누가 딸지 모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 스스로는 나쁘지 않았다. 상업적 성공은 못 했지만 반성할 수 있는 경험을 많이 쌓았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등 상업적으로 실패한 영화들에 대해 뭐랄까, 능력과 자질이 부족한 인간에게 의욕이 넘치면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의욕만 키워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각, 거기에 부족한 걸 채우려는 의욕, 그런 것들의 과정이었다. 어쨌든 ‘소원’이 관객 270만명을 끌며 소기의 성과가 있었고 ‘사도’에 ‘동주’에…. 또 이렇게 인생은 새옹지마 아닐까.”

―상업영화 감독 타이틀을 벗고 소위 예술영화를 찍고 싶은 욕망은 없나.

“그런 욕심은 없다. 그동안의 삶의 궤적을 부정할 순 없는 거 아닌가.”

―한 인터뷰에서 ‘대중은 영화 속 인물의 상처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했다. 위안을 주기 위해 영화를 만드나.

“내가 위안받기 위해 만든다. 공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영화를 찍을 수 없다. 공감이란 논리가 아닌 무의식의 문제인데, 끌린다는 건 내가 위안받고 싶다는 욕망이 무의식에 있다는 거다. 시나리오를 장면으로 구현해 찍는다는 건 그걸 목도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있다는 거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는 장면의 페이소스(pathos·정서적 호소력)를 예로 들자면 이 부당한 것을 온전히 설명하려면 영조, 혜경궁, 영빈, 주변 정치 세력 등 수많은 사람의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타자의 정당성을 통해 부당함이 온당해지고 부당함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의 면적을 넓혀가는 게 곧 지혜다. 그런 이해를 통해 내게 있었던 페이소스, 즉 불행한 존재에 대해 공감하는 심정이 해소되고 치유되는 거다.” 이준익에게는 ‘뇌에 혀가 달린 사람’이란 별명이 있다.

“깨달음은 실패에서 온다”

이준익이 일곱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우면서 동시에 향초를 켰다. 오른쪽에서는 담배 냄새가 왼쪽에서는 향초 냄새가 났다. 방 안 공기에 그의 영화 인생처럼 씁쓸함과 달콤함이 뒤섞여 있었다.

―어릴 땐 어떤 아이였나.

“수줍음 많고 온순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 날은 춥고 오줌이 마려웠는데 손들고 ‘화장실 가고 싶어요’ 말할 용기가 없어서 운동장 바닥에 그만 싸 버렸다. 바지 틈새로 뜨겁게 흐르던 오줌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수치스럽던지 누가 봤을까 봐 얼굴이 빨개졌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끄러운 감정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의 집 담벼락의 우둘투둘한 돌기를 훑으며 걸었는데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최초의 ‘사회적 자의식’이 생기던 날의 그 트라우마가 나중에 ‘왕의 남자’에서 공길이 자살을 기도한 후 연산이 녹수를 찾아가면서 손으로 창살을 ‘두둑두둑’ 훑는 장면을 찍게 된 심리적 동기가 됐다. 자신의 묘한 열등의식을 바라보는 감정적 시선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할아버지가 한학자셨다. 할아버지와 다섯 살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한방을 썼다. 새벽이면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먹을 갈았다. 그래서 동양화과에 진학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6·25 참전하신 분이다. 노동자로 고단한 소시민의 삶을 사셨다.”

―어머니는.

“자식을 무한정 신뢰해주셨다. 그것만큼 아들에 대해 큰 용기를 주는 게 없다. 공부를 못해도 타박하지 않고 시험 기간에 책상에 앉아 졸고 있어도 ‘그만 자라’ 했지 한 번도 구박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어머니의 믿음이 나를 지탱한다. 그게 내 복 중 가장 큰 복이다. 그런데 사생활 이야기는 그만 하자.”

―대체 사생활 이야기의 어떤 점이 싫은 건가.

“‘개인적인 포인트’가 싫다. 영화와 관련된 직업적 선택 이야기야 좋다. 그런데 개인 이준익은 내가 봐도 형편없다. 소위 ‘스타 감독’이라고 표상처럼 만들어진 이미지가 있지 않나. 그것과 개인은 다른 건데 기자들이 기사를 위해 쓰는 짜맞추기식 스토리텔링이 너무 싫다. 읽는 사람도 그런 사연 구도로 기억하려 하고 그것이 오해와 오류를 낳는 게 싫다는 거다. 예를 들어 가난했던 과거. 옛날에는 다 가난했다. 그건 벼슬이 아니다. 아주 보편적인 삶이다. 나는 소위 ‘석세스 스토리(success story)’를 아주 싫어한다. 미화된 조작일 뿐이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영화인이었다.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이준익은 실패와 성공의 롤러코스터, 그를 통한 반성과 성숙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했다. “성공과 실패를 왕복달리기하듯 하다 보니 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작품 자체가 성공했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결국 인생은 ‘똔똔’”이라는 것이다.

―실패와 성공의 반복을 통해 결국 얻은 건 뭔가.

“자기 성찰이다. 깨달음이란 성공보다 실패나 실수에서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실패와 실수란 게 자기의 못난 모습을 자각하게 되는 거라 그렇다. 실패해놓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거나 조건을 탓하면 실패와 실수가 주는 선물을 걷어차는 것이다. 교과서 같은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다르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는 남 탓하지 않는다. 일종의 ‘착한 아이 콤플렉스’이기도 한데 그래야 잠을 편히 잘 수 있다. 자신의 열등감을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건… 고통스럽고 힘들다. 그러나 그것만큼 내일(來日)을 성실하게 만드는 게 없다.”
조선일보 B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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