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 한국왕비 살해 시신 불태워” 119년전 세계신문들 명성황후 시해 속보

뉴시스
입력 2014.03.22 09:46

“시녀들 13명도 살해..명성황후 암살 두려움 속 비밀통로도”

오는 26일 순국 104주기를 맞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 재판정에서 당당히 밝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15가지 이유중 첫번째는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 저격이 20세기초 ‘세기의 사건’이었다면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저물어가는 19세기 세계인들을 경악케 한 ‘세기의 만행’이었다.

은둔의 왕국 조선에서 일어난 경천동지할 사건은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세계의 주요 매체들이 속보를 전하는 등 비상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21일 뉴시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시해가 일어난 1895년 10월8일의 을미사변(乙未事變)을 가장 먼저 보도한 미국 매체는 뉴욕타임스였다. 사건 발생 나흘뒤인 10월12일 뉴욕타임스는 워싱턴발로 짧지만 긴박한 송고기사를 보냈다. ‘격동의 서울 사건(Seoul's Turbulent Affairs)’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나가사키에 있는 카펜터 해군소장이 11일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아주 혼란스런 사건이 벌어졌다고 전문을 보내왔다. 그는 왕비가 암살된 것으로 보이며 왕과 그의 측근들이 미국 공관에 피난처를 마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공관 대리대사의 긴급한 요청에 따라 요크타운호의 해군병력이 현지의 인력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긴급 파견됐다.”

한국의 왕비가 시해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 등이 미국 공관에 피신했으며 일본에 있던 미 해군병력이 긴급 파병됐음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이튿날인 10월13일 더 모닝타임스도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1면 중단에 넣어 속보로 전했고 10월14일 이브닝스타의 보도가 이어지는 등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보였다.

또한 워싱턴의 풀먼 헤럴드(Pullman herald)는 일주일 뒤인 10월 19일 “정치국장인 코우로마 백작이 최근 서울에서의 반란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했다.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주도하는 반개혁파에 의해 왕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무장한채 왕궁을 난입해 들어왔다”고 기사를 송고했다.

일본의 낭인배들이 ‘여우사냥’이라는 암호아래 치밀한 시해계략을 꾸민 뒤 이를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군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는 내용이 보도된 것이다.

그러나 을미시해가 다름아닌 일본이 주도한 것이라는 목격자 증언과 정황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세계 언론도 관련 뉴스를 전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보도는 심지어 뉴질랜드 미디어의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매체인 더 프레스는 1895년 11월26일 5면에 ‘한국왕비의 암살’이라는 기사에서 명성황후는 물론, 13명의 궁녀들이 살해됐으며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과 함께 배후가 일본임을 시사했다.

“차이나 메일이 한국의 왕비와 13명의 시녀가 암살된 사건에 관한 상세한 소식을 전해왔다. 약 200명의 한국 군인들이 왕비가 사는 궁전의 입구를 난입했으며 일본인이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들과 궁궐 수비대 장교를 죽인 암살자들은 반역자들이며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앞서 11월22일 텍사스의 포트워스 가제트는 ‘계획된 살인 음모’ 제하의 기사에서 “친일파 숙청후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명성황후의 책략을 눈치 챈 대원군을 비롯한 반대파들이 선수를 친 것”이라며 일본의 음모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신문은 일본의 낭인배들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암살자에 대한 예비조사가 히로시마에서 시작됐다고 전해 눈길을 끌었다. “피의자가 수감된 히로시마에서 예비조사가 시작됐다. 이노니는 아직 한국에 있지만 곧 돌아올 것으로 보이며 일본은 한국의 내외무 권한을 통제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군대의 철수가 준비되는 중이다. 러시아가 코 앞에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선택은 달리 없다.”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을미사변 사건 직후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통해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 梧楼)에게 항의하고 그가 사실상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히는 베베르 보고서를 남겼다.

포트워스 가제트는 고종의 새 왕비를 간택하는 기사를 실어 눈길을 끌었다. “내무대신은 왕의 새로운 배우자를 간택하기위한 계획을 선포했다. 이날부로 전국에서 13세부터 17세 사이의 모든 소녀들의 혼인이 금지된다. 30~40명이 1차로 지명되고 이중 3명을 다시 골라 최종적으로 1명이 왕비로 선택이 된다.”

을미사변이후 허수아비가 된 고종은 친일내각 김홍집에 의해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종용을 받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 불과 8일만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1919년 붕어할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11월10일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가제트를 인용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까지 밤잠을 자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속에 살았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한국 왕비의 특징(Characteristics of Queen of Corea)’는 기사에서 “최근 별세한 한국의 왕비는 전혀 행복한 인생을 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관련자료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명성황후는 왕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조정의 모든 자리들을 가장 비싼 값을 제시하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그녀는 사람들을 탄압했고 그래서 끊임없이 암살의 두려움을 가졌다”고 전했다.

이어 “왕비는 밤을 새우는 습관이 있었고 아침 5~6시까지 침소에 들지 않았다. 침실도 여러개 있었기 때문에 측근외에는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었다. 방아래엔 비밀통로로 연결되는 작은 문이 있었고 발이 빠른 수행원들이 항상 지켰다. 언제든 즉시 달아날 수 있는 운송수단을 대기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예방책은 소용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해가 바뀌어도 세계 언론의 관심은 식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 양상을 보였다. 1896년 1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상세히 묘사해 미국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을미사변은 큰 파장속에 세계 각국에 퍼져갔으며 극동의 조선이라는 나라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서는 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이후 백성의 민심이 극도로 악화됐으며 복수를 외치는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14년후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육혈포 세발로 처단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등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세상에 알렸다.

일본국회 도서관 자료에 따르면 을미사변의 행동대장은 미우라 일파였지만, 진짜 주동자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최고위층의 각료였다. 안중근의사의 육혈포 총성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이웃 나라 국모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워 능욕한 대일응징의 서곡인 셈이다.
공시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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