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재벌폰·귀족폰과 맞짱 뜬 '평민폰'의 운명은…

입력 2013.05.07 23:06

日 50대 주식부자 중 68% 창업1세, 우리는 78%가 대물림 상속 부자들
'창업자 신화'가 사라진 한국… 팬택, 맨땅서 매출 2조원 기업 일궈
독과점 비판하며 대기업 브랜드 선호, 우리의 二重性이 '재벌공화국' 만들어

박정훈 부국장·기획에디터

그래도 늙은 일본 경제보다야 한국의 기업 생태계가 젊고 역동적이지 않을까. 우리의 고정관념을 포브스지(誌) 아시아판에 실린 한·일 부자 순위가 여지없이 깨주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일본의 50대 주식 부자는 창업 1세가 68%에 달했다.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1위)나 소프트뱅크의 손정의(3위) 등이 모두 자기 힘으로 기업을 일으켜 당대에 부호 반열에 올랐다. 장기 침체 속에서도 일본엔 기업가 혁신이 시시각각 부자 지도를 바꿔놓는 역동성의 엔진이 살아있었다.

우리는 최고 부자 50명 중 78%가 대물림 상속 부자다. 특히 톱10은 이건희(삼성)·정몽구(현대)·서경배(아모레퍼시픽)·신동빈(롯데)·이재현(CJ) 등 전원 재벌가 2·3세로 채워졌다. 제대로 된 시장경제 국가 중에 이렇게까지 부(富)가 고착화된 나라가 또 있을까.

앞으로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대우 김우중의 몰락 이후 맨손에서 시작하는 '창업자 신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샐러리맨의 우상이라던 웅진의 윤석금이 무너졌고, STX의 강덕수도 위기에 몰렸다. 게임·인터넷을 제외하고 제조업에서 유일하게 남은 10대 부자 후보는 팬택의 박병엽(51) 부회장 정도 아닌가 싶다.

지난달 말 삼성의 '갤럭시S4'가 출시된 날, 스마트폰 모델이 또 하나 시장에 나왔다. 팬택의 '베가 아이언'이었다. 그러나 존재감은 약하기만 했다. 세상 관심은 온통 갤럭시S4에 쏠렸고, 베가 아이언은 마이너리그 B급 비슷한 취급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번만이 아니다. 팬택은 4~5년 전부터 새 모델을 낼 때마다 항상 삼성과 같은 날을 잡아 푸대접을 자초했다. 박병엽 부회장에게 이유를 묻자 "맞짱 뜨자는 거죠"라고 했다. 피하지 않고 정면 대결하겠다는 얘기인데, 계란으로 바위를 칠 기세만큼은 대단했다.

팬택은 무(無)에서 출발한 휴대폰 회사다. 22년 전 직원 6명으로 시작해 매출 2조원대 중견 기업이 됐다. 창업자 박병엽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지방대를 나온 전형적 비(非)주류 출신이다. 그는 맥슨전자 영업 사원이던 31세 때 사표를 던지고 전세금 4000만원을 빼내 회사를 차렸다.

천하의 삼성과 맞짱 뜨겠다는 팬택은 많은 면에서 삼성과 대조적이다. 삼성은 계열사군(群)을 수십 개 거느린 거대 그룹, 팬택은 한 품목만 파고든 전문 기업이다. 삼성은 한국 최고 재벌로 수십 년을 군림했고, 팬택은 밑바닥에서 벤처 신화를 만들었다. 이건희 회장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면, 박병엽은 본인 말대로 죽기 살기로 자수성가한 '평민 출신'이다.

말이 쉬워 창업 신화지, 보통 험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병엽이 팬택을 창업할 당시 국내엔 크고 작은 전자업체 20여개가 있었다. 그 대부분이 죽거나 흡수당했고 지금은 삼성·LG, 그리고 팬택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만큼 산업 생태계가 대기업 일변도로 황폐화됐다.

팬택도 지금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한때 '제2의 대우' 소리를 들어가며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 미래가 불투명할 만큼 고전 중이다. 열악한 상황에서 스마트폰 국내 2위 자리를 지켜온 것만 해도 팬택의 대단한 저력이었다. 그랬는데 결국 LG 옵티머스에 역전당해 꼴찌로 밀려났다.

모바일 업계 관계자는 팬택 베가를 '평민폰'에 비유했다. 돈(자금력)도 백(조직력)도 없이 삼성·LG의 '재벌폰'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귀족폰'과도 생존을 걸고 경쟁한다. 실리콘밸리의 첨단 환경을 누리는 애플 아이폰 말이다.

우리는 삼성폰·LG폰이 더욱 훨훨 날아주길 바란다. 세계시장에서 약진하는 두 재벌폰은 대한민국의 자랑거리다. 동시에 베가도 훌륭하게 성공해 '평민폰 신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세상, 박병엽이 뭔가 일을 내주었으면 한다.

정부가 도와줄 수도 없고, 국민이 동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박병엽은 "(소비자) 편견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제품은 자신 있는데 마케팅과 브랜드 파워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핑계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 누구도 말하지 않는 불편한 현실이다.

우리 모두는 대기업의 독과점을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제품을 고를 때는 무조건 대기업 브랜드만 찾는다. 우리의 이런 이중성(二重性) 때문에 산업 생태계는 더더욱 재벌 공화국으로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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