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 페이퍼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유명우

스포츠조선= 최재성 기자
입력 2009.11.02 14:36




 키 1m64, 몸무게 49㎏. WBA(세계권투협회)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 18차례 방어. 작은 체구로 세계 주먹판을 주름잡았던 '인간 탱크' 유명우의 이력이다. 배가 고파 글러브를 꼈던 대부분 복서와는 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링에 올랐고, 숱한 고비를 넘어 세계 주먹계를 호령했다. 지금은 한국권투위원회 사무총장으로 한국 복싱의 미래를 걸머지고 있다. 진정 승부를 즐길 줄 알았기에 변함없이 땀내에 묻혀 지낼 수 있으리라.










성공 행진곡 - 죽음의 전주곡 '운명의 갈림길'








18차 방어전때 심판 '채점 미스'로 벨트 빼앗기는 불운

제소끝 리턴매치 … 보란듯 이기고 명예롭게 벨트 반납



 ▶작은 아이의 큰 꿈


글러브를 처음 낀 건 서울 삼성초 6학년 때였다.같은 반 친구가 학교에 글러브를 가져오는 바람에 체육시간이 권투시간이 되어 버렸다. 선생님이 둘둘 짝지어 스파링을 시켰고, 잠자코 있던 유명우도 손을 들어 글러브 낄 기회를 얻었다.


키가 작아 1,2번을 도맡았으니 친구들의 반응은 뻔했다.한데 선생님의 시작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나가 상대 아이를 일방적으로 두들겼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쥐방울 만한 녀석이 날렵한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힘세고 저돌적인지는 미처 몰랐던 거다.초등학교 마지막 수업은 각자의 꿈과 목표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망설임 없이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약속했다. "훌륭한 세계챔피언이 되겠습니다."


▶웃음거리가 된 꼬맹이



한강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복싱체육관을 찾아가 등록했다. 신림동 집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봉천동 대원체육관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김진길 관장을 비롯해 운동하던 관원들의 눈이 모두 쏠렸다. 코흘리개 갓 면한 듯한 꼬맹이가 무시무시한 복싱체육관에 들어섰으니 다들 의아할밖에. 김 관장이 물었다. "왜 왔어?" 유명우가 대차게 답했다. "세계챔피언 되려고요."


순간 복싱체육관은 웃음바다가 됐다. 1m40 갓 넘은 꼬맹이가 복싱하겠다고 온 것도 같잖은데 대뜸 세계챔피언이 되겠다니.... 김 관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관원들도 배꼽을 쥐었다. 그리고는 우르르 몰려와 귀엽다며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다들 꼬맹이의 각오를 하찮게 여긴 것이다. 한데 운동하겠다고 찾아온 아이를 굳이 쫓을 필요는 없었다. 복싱이 신체 단련에 다시 없는 운동이기에. 모르긴 해도 김 관장은 '줄넘기 좀 하다가 힘들면 관두겠지' 하는 마음이었을 게다.


김 관장은 나중에 김철호 백현만 지인진 등을 키운 명조련사. 그러니 체육관은 제대로 찾아간 셈이다.


다음날 운동을 시작했다. 학교가 파하면 체육관에 들러 1시간가량 뛰고 집에 갔다. 집에는 비밀로 했다. 초등학교 갓 졸업한 막둥이(4남2녀)가 험한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 난리 날 게 뻔했다.


일단 거울 앞에서 스텝과 줄넘기 연습을 했다. '한 이틀 나오다 말겠지' 하던 선배들의 생각을 뒤집으며 그렇게 체육관 분위기에 젖어 갔다.


링에 오른다든가, 백을 친다든가 하는 멋진 장면은 꿈도 못 꿨다. 김 관장이 아예 링이나 샌드백 근처에도 못 가게 한 것이다. 기본기 훈련에 충실하라고. 거울 앞에서 꼬박 6개월을 헐떡거리고서야 겨우 샌드백을 칠 수 있었다. 중3 때 체육관 대항전에서 이겨 상을 받았다. 비공식 경기였지만, 선수들 사기 진작 차원에서 상장을 줬다. 더는 숨길 수가 없었다. 상을 받고 기분이 좋아 부모님께 보여 드렸더니 뜻밖에 용기를 주셨다. "기왕 시작했으니 잘해 봐라."


▶만날 깨지기만 하고


중학교 3학년 말에 치른 공식 데뷔전에서 졌다. 동대문운동장 배구장 특설링에서 펼쳐진 전국학생신인선수권이 무대였다.


키가 작아 훅 위주로 맞섰고, 다운까지 시켰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크게 실망했죠. 아마추어 경기는 전체적인 운영보다는 포인트 중심이라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 탓에 학교도 가고 싶었던 서울체고를 못 가고, 인천체고로 돌려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전적은 영 신통찮았다. 선배들 그늘에 가려 2년 동안 겨우 세 경기를 뛰었고, 딱 한 번 이겼다. 그것도 전국대회가 아닌 경기도 학생신인전 1라운드에서다. 아마추어 종합전적 4전 1승 3패. 초라하다.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선수였다.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량은 좋은데 붙었다 하면 깨지니 말이다.


"나중에 결론 내렸습니다. '아마추어는 정통 복싱을 해야 하니 키 작고 리치 짧은 나한테는 안 맞다. 프로로 가야 한다'고요."


사실 중3 때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웬만한 프로선수와 스파링을 해도 대등했고, 이따금 그들을 능가하기도 했다. 얼마나 잘했으면 교습료를 다 면제받았을까.


"중3 때였어요. 하루는 관장님이 부르시더니 앞으로 회비 내지 말고 그냥 운동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일종의 장학생이 된 거죠. 물론 제가 생각해도 열심히 했고 나이에 비해 잘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관장님께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시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아마추어 대회만 나갔다 하면 깨지니 다들 고민이었죠."


남몰래 노력도 많이 했다. 중3짜리가 프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자면 얼마나 독하게 어금니를 물었을까. "어리다고 관장님이 화려한 기술을 안 가르쳐 줬어요. 그래서 선배들 스파링을 보면서 멋진 펀치가 나오면 그걸 집요하게 연습해 내 걸로 만들고 그랬죠." 주말이면 어김없이 문화체육관을 찾았다. 복싱이 인기를 누릴 때라 매주 경기가 열렸다. 거기서 또 눈동냥을 했다.


▶둘 다 이겼건만...


고3이 되면서 항로를 바꿨다. 아마와 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 프로를 택했다.


"1982년 3월 24일, 청주에서 데뷔전을 가졌습니다. 플라이급으로요. 최병범 선수와의 4라운드 경기에서 판정승했습니다. 그 선수는 스물다섯 살인가 그랬는데 정말 무시무시했어요. 험상궂게 생긴 데다 수염도 텁수룩하고 근육도 울퉁불퉁하고 그랬거든요."


전날 청주에 내려가 여관에 들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에 한숨도 못 잤다. 체중 줄인다고 하도 굶어 배도 고팠다.


"링에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상대가 무서워 그냥 안 맞으려고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던 것 같아요. 어떻게 뛰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더라고요."


데뷔전은 김득구와 김강민의 라이트급 동양타이틀전 오프닝 경기로 펼쳐졌다. 그날 이긴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타이틀 도전권을 얻었고,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 챔피언 레이 맨시니와 싸우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운명이란 건 참 묘하다. 그날 승리가 유명우에게는 영웅으로 가는 발판이 됐고, 김득구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됐으니 말이다.


▶마침내 최고의 주먹으로



공사판에서 돌아온 유명우는 복싱 천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석 달 만에 모든 걸 정상궤도에 올려놨고, 12월 4일 가진 재기전에서 임하식을 꺾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15일 필리핀의 리틀 바기오를 문화체육관으로 불러 2라운드 KO로 눕혔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승부였다. 10라운드 데뷔전에, 첫 국제전에, 14전 만에 거둔 첫 KO승이었다.


이후는 탄탄대로. 84년 12월 에드윈 이노센시오(필리핀)를 눕히고 동양 주니어플라이급 왕좌에 올랐고, 두 차례의 KO승을 추가한 뒤 세계 정상에 도전장을 냈다. 85년 12월 8일. 챔프 조이 올리보(미국)를 대구로 불렀다.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매치. 처음으로 뛴 15라운드 경기였지만, 정신무장을 새로 한 유명우의 저돌적인 주먹 앞에서 올리보는 벨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19전 19승 4KO. 세계 챔프에 올랐을 때의 유명우 전적이다.


▶영원한 챔프로 기록되다



91년 봄까지 무려 17명의 도전자를 물리쳤다. 17차례 방어하는 동안 KO승을 10차례나 장식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주먹의 강도까지 더했다.


단 하나 달갑잖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안방 호랑이'였다. 그때까지 홈경기만 치른 것이다.


91년 12월 17일, 마침내 이오카 히로키(일본)와의 18차 방어전이 원정경기(오사카)로 잡혔다. 첫 해외 나들이에 대한 부담이 없잖았으나, 그때까지의 전적이 36전승 14KO였으니 겁날 게 없었다.


"방어전 횟수가 늘 때마다 초심을 생각했습니다. 떴다가 한 방에 가는 선수 여럿 봤기 때문에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사실 챔피언은 여러모로 부담스럽습니다. 전력은 이미 다 드러났죠. 너도나도 벨트 갖겠다고 뼈를 깎는 훈련을 해 덤벼 오죠. 엄청난 운동량이 없으면 못 버팁니다."


자신을 많이 다그쳤다. 자만하지 말라고. 힘들 때 생각하며 열심히 하라고. 훈련도 엄청나게 소화했고, 이미지 트레이닝도 많이 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대2 판정패. 20차 방어전을 마치고 타이틀을 반납하면서 명예롭게 은퇴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라커룸에 갔더니 심판들이 수군거렸다. "채점 미스다. 챔피언이 방어했다." 하지만, WBA에서는 판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고, 제소 끝에 리턴매치가 받아들여졌다. 벨트를 빼앗긴 지 11개월 만에 같은 자리에서 이오카와 마주 섰다. 이오카의 3차 방어전이었다.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각오로 훈련했습니다. 10㎞ 로드워크에 관악산 크로스컨트리에.... 연주암까지 40분 만에 주파했지요. 그리고 기자회견 자리에서 이오카에게 '벨트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벨트를 찾아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듬해 여름 호소노 유이치(일본)를 깨고 1차 방어전에 성공한 후 WBA에 벨트를 반납했다. 돈보다 '영원한 챔프'라는 명예를 선택한 것이다. 종합전적 39전 38승(14KO) 1패. 유일한 패배가 잘못된 판정으로 기록된 이오카와의 승부였다.













공사판 6개월 막일 했다는데...
관장님께 싹싹 빌고 각서까지 쓰고 겨우 돌아왔죠~

 ▶공사판에 뛰어든 복서



과연 프로가 딱 맞았다. 데뷔전서 이기고 곧바로 제2회 KBS 전국신인선수권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플라이급 우승. 모두 판정승이었지만 화끈한 경기로 감투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랭킹(10위)에 진입하며 8라운드 선수가 됐다.



그 후 세 차례 경기에서 전승하고, 83년 3월 안래기까지 꺾으며 12전승 가도를 달리자 한국타이틀전 일정이 잡혔다. 한국 플라이급 챔프 자리를 놓고 84년 초 마수년과 결정전을 갖게 된 것이다.



한데 유명우의 질주는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슬럼프가 온 거죠. 고등학교를 막 졸업해 한창 먹고 놀 나이에 지옥 같은 감량을 하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사우나에는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물리적으로 체중을 줄이면 경기 때 힘을 못 쓰니까요. 그래서 보통 경기 석 달 전부터 식이요법을 하면서 강한 운동으로 체중을 줄였습니다."



60㎏짜리가 굶어가며 운동으로만 11~12㎏을 뽑자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그마치 체중의 20%가 아닌가. 온전하게 버티면 그게 되레 이상할 만큼 혹독하고도 무모한 감량인 셈이다.



결국, 천금의 기회를 날리고 말았다. 심적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경기를 펑크낸 것이다.



"도망갔습니다. 강원도 용평으로요. 마침 친구가 용평스키장 리조트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다른 친구 셋이랑 찾아갔습니다. 운동은 이미 버렸죠. 거기서 막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방황했습니다. 일생일대의 오점을 남긴 거죠."



나중에 후회가 밀려왔다. 글러브 대신 목장갑을 낀 자신의 손이 너무 낯설었다. 실망스러웠다. 같은 반 친구들과 담임선생님 앞에서 한 약속도 생각났다.



"이거는 아니다 싶었는데 관장님께 용서를 빌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방황이 더 길어진 거죠. 결국, 권투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고 관장님을 찾아가 무릎 꿇고 백배사죄 했습니다."



정말 호되게 야단맞았다. 각서까지 쓰고서야 글러브를 다시 낄 수 있었다.



< 최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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