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순 지엔 퍼퓸 대표 “조향은 예술이자 훌륭한 마케팅 수단”

김문관 이코노미조선 기자
입력 2019.05.18 08:00
[이코노미조선]
국내 1세대 조향사로
제자 수백 명 양성
규제로 산업 위축 우려

정미순 지엔 퍼퓸 플레이버 대표가 서울 방배동 본사에서 본인이 조향한 향을 소개하고 있다. 연세대 화학과, 일본 미야 프래그런스 스쿨 조향과정 수료, 서울대 바이오엔지니어링 박사과정 수료, 지엔 퍼퓸 플레이버 스쿨(조향교육기관) 대표. /채승우 객원기자
"향(香)은 기억입니다."

정미순(54) 지엔 퍼퓸 플레이버 대표는 6일 서울 방배동 본사에서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하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향기가 가진 각인효과가 크기 때문에 기업들이 브랜드 마케팅 차원에서 향기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2002년부터 국내에서 향을 만든 1세대 조향사(調香師·향을 만드는 사람)다. 정 대표는 어릴 적에 화장품 기업을 만든 미국 에스티 로더의 전기를 읽고 그가 전공한 화학과로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조향 교육을 받고 프랑스 그라스의 유서 깊은 향수 업체 갈리마드와 라이센스 계약을 맺으면서 국내에서 향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현재 정 대표는 직접 조향한 향수를 제작·판매하는 한편,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향료 회사와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는 제자를 수백 명 배출했다. 조향사는 퍼퓨머(perfumer)와 플래버리스트(flavorist)로 나뉜다. 퍼퓨머는 향장품(화장품과 향수제품 총칭) 향료 조향사, 플래버리스트는 먹을 수 있는 식품향료 조향사다.

정 대표는 많은 기업의 의뢰를 받아 브랜드 고유의 시그니처 향도 개발하고 있다. 지난해 제주항공에서 선보인 시그니처 향수가 그의 작품이다. 가수 비와 그룹 신화의 시그니처 향수도 만들었다. 드라마로 제작됐던 웹툰 ‘냄새를 보는 소녀’와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의 자문역할도 했다.

정 대표는 인터뷰 중 지난해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받은 영감을 담아 개발한 동명의 향수를 소개했다. 직접 시향해보니 오래된 성당을 연상하게 하는 은은한 나무 냄새 속에서 한 줄기 밝은 빛과 같은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연극의 주인공인 순수한 수녀 아그네스가 아무도 없는 성당에서 경건히 기도하는 모습을 담았다고 정 대표는 설명했다. 정 대표는 "조향은 각각의 노트(Note·음악에서는 음표, 조향에서는 향료를 뜻함)를 조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활동이자 훌륭한 상업 마케팅 수단이다"라고 강조했다.

왜 본인이 국내 1세대 조향사인가.

"한국에서 조향은 화장품 산업과 함께 발전했다. 그런데 과거 국내에는 조향사라는 개념이 없어 화장품 회사의 연구원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2002년 조향사라는 타이틀로 국내에서 프리랜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관련 회사도 창립했다. 17년이 지난 현재는 조향사라는 직업이 꽤 익숙해졌다."

향기란 무엇인가.

"누구나 생각하듯 ‘기분 좋게 하는 냄새’를 뜻한다. 중요한 것은 향기가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향기는 한자로 풀면 향(香)과 기(氣)를 합친 단어다. 단순히 기분 좋은 냄새가 아니라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매개체다."

기업이 왜 향기에 주목해야 하나.

"기업 마케팅은 시각과 청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청각은 보다 분석적이고 직접적이지만, 후각은 감성적이고 무의식을 자극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향기 마케팅은 더 오래 기억되는 특성이 있다. 길을 걷다가 맛있는 냄새가 나면 본인도 모르게 잠시 멈춰서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소비를 유발한다. 의류 매장에서 향기를 사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 마케팅에 향기를 적용하면 소비자가 더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다."

향기 마케팅 사례는.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인 건 미국 의류 회사 아베크롬비앤드피치의 사례다. 이 회사는 브랜드의 향기를 인식시키기 위해 전 세계 모든 매장과 제품에 같은 시그니처 향을 사용하고 있다. 어디서나 향을 맡으면 아베크롬비앤드피치의 향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브랜드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례다. 패션 업계는 물론 호텔 업계, 자동차 업계, 항공 업계 등도 적극적으로 향기 마케팅을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빌딩과 사무공간에서도 향기를 활용한다."

최신 사례도 궁금하다.

"한국 의류제조 스타트업 ‘킥(keek)’은 최근 론칭한 옷과 모자에 시그니처 향수를 뿌려서 판매하고 있다. 이 향은 이재호 킥 대표가 직접 조향했다. 그는 약 6개월간 조향기술을 배웠다. 본인이 조향한 향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좋아 마케팅에 접목한 것이다."

향기 마케팅의 유래는.

"패션 분야다. 과거 프랑스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과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이 주축이 돼 고급 패션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들은 브랜드 정체성을 더 확립할 수단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1920년대 샤넬은 고급스러우면서도 고전적인 브랜드 정체성 확립을 위해 시그니처 향을 개발했다. 1921년 출시된 샤넬의 ‘넘버 파이브(No.5)’ 향수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100여 년이 흐른 현재도 판매되고 있는 샤넬의 상징이다. 이 같은 시그니처 향은 주요 패션 브랜드들이 모두 개발하게 됐으며 이후 다양한 분야로 확산됐다."

제자는 몇 명이나 있고, 어떤 일을 하나.

"현재 약 600명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민간자격증을 취득하고 화장품 회사나 향료 회사에서 일한다. 소규모 공방을 차리는 경우도 많다. 향기의 재료는 천연향과 화학향을 합해 약 5000종에 달한다. 향료 회사는 주로 향기의 재료를 판매하는 한편 클라이언트(고객)가 원하는 이미지에 따라 새로운 향을 만들기도 한다. 새로운 향을 만드는 게 조향사의 업무다. 화장품 회사의 경우 향을 각각의 제품에 적용하는 일을 한다. 이를 부향이라고 한다. 로션 등 제품에 걸맞은 향을 자연스럽게 섞는다는 의미다."

조향사가 되기 위한 자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향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또 중요한 건 창의성과 감각이다. 음악과 미술 등 다양한 예술을 좋아하는 편이 좋다. 전공은 화학이 유리하다. 조향의 재료 자체가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자량, 휘발도 등 원향이 가진 물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조향은 음악과 그림과도 관계가 있나.

"그렇다. 조향 용어는 음악에서 유래했다. 각각의 음표를 ‘노트’라고 하듯 각각의 향도 노트라고 한다. ‘어코드(화음)’도 조향에서 쓰이는 음악 용어다. 음악에서 말하는 강약과 균형도 조향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조향사 교육 과정에 ‘컬러 이미지’에 맞게 조향 훈련을 하는 부분이 있다. 색에 걸맞은 향을 만드는 과정이다. 빨간색 제품을 보면서 파란 이미지의 향을 맡으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어울리는 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향은 공감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관련 산업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2012년 옥시 가습기 살균제에서 유해 화학물질이 발견된 사태 이후 화학물질관리법이 강화돼 향기 산업에는 전반적인 악영향이 있다. 향기 산업이 발전한 일본의 과거 트렌드를 보면 한국에서도 더 클 수 있는 시장이었는데 정체된 감이 있다. 주무부처도 과거 식약처에 더해 최근에는 환경부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다. 안전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규제강화가 필요하지만, 꼭 필요한 규제만 강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향료 전체를 유해물질로 규정해 법을 적용하면 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안전검사를 받아야 해서 부담이 크다. 조향은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이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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