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중환자실엔… 中企사장도 맞벌이 부부도 "살려주세요"

최종석 기자
입력 2018.12.13 03:09

붐비는 회생법원 가보니… 직장 잃은 2030까지 몰려 '눈물바다'

"제가 22년을 죽기로 운영한 회사예요. 꼭 살리겠습니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서울회생법원 1호 법정 앞. 건설회사 대표 김모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읍소하자 웅성웅성하던 채권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이날 김씨는 빚을 깎아줄 수 없다는 저축은행·대부업체 등 채권자들 반대 때문에 법원의 회생 절차 승인을 받지 못했다.

연 매출 200억원대였던 김씨의 건설 회사는 최근 1년 새 부동산 경기가 얼어붙으며 못 받은 공사 대금이 140억원으로 불었다.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7만~8만원 하던 인부의 인건비가 10만~13만원으로 뛰었다고 한다. 자재값도 10% 이상 올랐다. 급전이 필요했지만 은행은 대출을 거절했다. 그는 "부동산 규제가 강화된 이후로 중소 건설 업체에 대한 대출은 완전히 말랐다"고 했다. 결국 10년 넘게 함께 일하던 직원 33명 중 27명을 내보냈다. 지난 5월 자살을 시도했던 그는 퇴원하자마자 법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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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최근 전국의 회생법원이 다시 붐비고 있다. 회생법원은 도산한 법인(회사)이나 개인이 재기할 수 있도록 빚을 조정하는 일을 담당한다. 재기 가능성이 있으면 회생 절차를, 없으면 파산 절차를 밟는다.

2016년 이후 줄었던 법인회생은 올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1~10월 715건이었던 법인회생 신청은 올해 769건으로 늘었다. 회사를 살릴 희망조차 없어 문을 닫는 법인파산은 최근 7년 새 최다다.

◇"중소기업 사건 증가"… 자동차 부품 업체 연쇄 도산

회생법원은 우리 경제의 '중환자실'로 통한다. 경영난에 시중은행에서 저축은행·대부업체로까지 떠밀려 나간 회사들이 살려 달라고 찾아오는 곳이 회생법원이다. 서울회생법원 정준영 수석부장판사는 "법조계에선 법인회생을 경기를 반영하는 지표로 본다"며 "회생법원이 붐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가 어렵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같은 법원의 김유성 판사는 "가장 염려스러운 점은 빚에 시달리다 찾아오는 회사 중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가 자꾸 늘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IMF 경제 위기나 글로벌 금융 위기 때는 대기업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요즘은 중소기업·자영업자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한다. 판사들은 "회사를 다시 살리기 힘들 정도로 기업 상태가 나빠 안타깝다"고 했다.

실제로 이날 30~40분 단위로 열린 법인회생 집회 6건이 모두 중소기업 사건이었다. 자동차 부품, 건설, 가전, 식품, 광고 등 업종도 다양했다.

건실했던 자동차 부품 업체들이 눈에 띄는 것은 부정적인 신호라고 판사들은 전했다. 법정에 나온 자동차 2차 협력 업체 간부 이모씨는 "인건비와 재료값은 계속 오르는데 제품 대금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며 "34년을 버텼는데 사드 사태, 최저임금 인상 여파를 넘지 못했다"고 했다. 연 매출 100억원인 이 회사는 빚만 100억원이다. 직원 50명 중 22명이 실업자가 됐다.

그는 "우리 회사와 거래하던 3차 협력 업체도 최근 파산 신청을 했다"며 "자동차 부품 업체들의 연쇄 도산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투자증권이 국내 43개 자동차 부품 업체 실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 3분기 이 회사들의 영업이익은 86억7000만원으로 작년 3분기보다 24.6% 줄었다. 경영 악화의 전염 속도도 빠르다. 올 2분기 43곳 중 3곳이었던 적자 기업은 3분기 들어 6배(17곳)로 늘어났다.

◇개인회생도 반등… 청년도 빚에 고통

"희망이 안 보여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지난 4일 서울회생법원에서 만난 이모(34·아르바이트)씨는 보험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지난해에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당장 쓸 돈이 줄어든 보험 가입자들이 줄줄이 보험 계약을 해지하면서 계약 때 회사에서 받은 인센티브 등을 토해 내게 된 것이다.

안 그래도 팍팍한 생활이 더 어려워졌다.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또 대출받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그는 빚에 시달리던 동료가 자살하자 정신이 번쩍 나 회생법원을 찾았다고 했다. 이씨의 빚은 7000만원에 달했다. 직장 생활을 막 시작한 30대에겐 막대한 액수다. 전자상가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버는 월급 170만원을 쪼개 3년간 갚아 나가야 한다. "처자식 없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더 가슴 아플 부모님께는 할 말이 없어요."

2014년 이후 줄던 개인회생도 올 들어 다시 늘기 시작했다. 지난해 1~10월 6만7444건이었던 개인회생은 올해 7만4962건으로 11%가 늘었다.

6일 오전 방문한 서울회생법원 9호 법정도 채무자들로 꽉 찼다. 72석 규모의 자리가 부족해 벽 쪽으로 20여명이 다닥다닥 붙어 섰다. 3명 중 1명이 2030세대였다. 갓난아기를 업고 온 엄마·아빠들도 있었다. 올 8월 개인회생을 신청한 PC수리기사 김모(37)씨는 학자금 대출에 전세 대출, 생활비 대출까지 내다보니 맞벌이 부부가 모두 빚쟁이가 됐다. 부부가 갚아야 할 빚은 1억5000만원이다. 김씨는 "월급은 3년 연속 180만원으로 동결인데 물가는 너무 올라 버틸 수가 없었다"며 "아기 낳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올해 최저임금 인상과 내수 침체의 타격을 한계선상에 놓인 중소기업과 개인들이 먼저 맞고 있는 것”이라며 "정책 변화가 없으면 내년에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법인회생

기업의 채권자, 주주 등 이해관계자들을 조율해 기업을 운영하면서 구조조정하고 빚을 갚아나가는 제도. 법인파산은 자산보다 부채가 많아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경우 남은 재산을 청산하는 절차다.

개인회생

월급을 받거나 영업 소득이 있는 개인 채무자가 3년간 최소 생계비를 제외한 수입으로 빚을 갚으면 나머지 빚은 면제해 주는 제도. 단 채무 총액이 무담보 채무는 5억원, 담보 채무는 10억원 이하여야 한다.



조선일보 B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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