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15) 이 시대의 리더들은 왜 ‘보헤미안’이 되려하는가

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
입력 2018.11.09 05:00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 일이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게 해야
리더는 이익과 의미를 다 줄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어

리더들도 흔들릴 때가 있다. 요즘처럼 마지막 남은 황금 낙엽이 춤추는 만추의 계절이면 더욱 그렇다. 공연히 허전하고 일상에서 일탈해 잠시 어디론가 불쑥 떠나고 싶다. 한 명의 ‘보헤미안’이 되어 뼛속 시리게 고독함을 느끼게 만드는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최근 개봉한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도 여기에 한 몫을 거든다.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퀸의 성장과정과 음악세계를 그린 영화이지만, 타이틀 곡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름 그대로 한 명의 외국출신 아웃사이더가 영국에 와서 음악의 꿈을 키우기까지 심리적 갈등을 담은 노래다. 어디 마음을 줄 곳 없는 이들에게 딱 맞는 노래였다.

웨스트런던대학 건물에 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포스터./사진=위키피디아
이곡의 작사 작곡과 노래까지 담당한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인도계 파르시의 후손이었다. 파르시란 ‘페르시아 계통의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인도의 주민’을 말한다.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절 ‘파룩 벌사라’(Farrokh Bulsara)라는 본명 대신 프레디 머큐리라는 예명을 쓰게 된다.

[미니정보]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고고학자 강인욱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영화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가 '좋은 생각, 좋은 행동, 좋은 말'을 계속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생활신조라고 한다.

퀸의 리드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사진=위키피디아
‘보헤미안 랩소디’란 자유인의 광시곡을 의미한다. 'easy come, easy go'라는 가사처럼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자유영혼의 예찬이다.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외면당한 인생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명곡이다.

보헤미아란 원래 체코 서쪽 지방을 일컫는다. 그런데 왜 예술가나 음악인, 혹은 작가처럼 자유영혼을 가진 이들을 가리켜 ‘보헤미안’이라고 말하는 걸까? 보헤미안의 어원은 ‘보엠’((Bohême)이라는 프랑스어에서 비롯된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전통복장./사진=위키피디아
여기에는 하나의 역사적인 착각이 있었다. 15세기 프랑스에서는 집시가 체코의 서쪽 보헤미아 숲 속의 신비로운 안개 속에서 나와 서유럽으로 건너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을 가리켜 ‘보에미엥’(Bohémien)이라 불렀다. 당시에 보헤미안이란 집시를 의미하였다. 떠돌이처럼 유랑하며 춤과 노래를 즐기는 민족이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는 반 고흐의 그림 24점이 있는데, 이 가운데는 ‘집시의 포장마차’(roulottes campement bohémiens)라는 작품이 있다. 1888년 남(南) 프랑스 아를 근교에서 집시가족의 삶을 담은 그림이다. 여기서도 반 고흐는 집시를 가리켜 보헤미안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흐의 작품 ‘집시의 포장마차’(roulottes campement bohémiens)./사진=손관승
아를은 프랑스에서 집시 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집시는 예술가들에게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규격화된 삶과 출세의 사다리를 거부한 라이프스타일은 낭만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평생 고독과 싸웠던 고흐는 예술가들의 이상향을 그리며 고갱과 매우 짧았지만 공동 작업공간을 마련했던 곳도 아를이었다. 여기서 집시와 보헤미안이란 속물주의를 벗어난 공동체적 삶을 의미한다. 베를린의 올드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는 르누아르의 ‘보헤미안’이란 그림 역시 1868년에 집시 족 여인을 그린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작품 ‘보헤미안’./사진=위키피디아
그러나 정작 체코의 보헤미아 사람들은 떠돌이 삶을 즐기지 않는다. 반(反) 사회적 성향도 아니다. 보헤미아 공국의 발상지인 플젠은 유명한 맥주 ‘필스너 우르켈’가 태어난 원산지다. 물맛이 좋고 맥주 맛이 뛰어나며, 근처에는 이름 높은 온천지역이 많다. 그것이 진짜 보헤미아다.

차츰 집시 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집시가 보헤미아 출신이 아니라 멀리 인도의 서북쪽에서 기원한 이동민족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집시와 보헤미안 용어를 분리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이 용어를 수입한 영국에서는 사회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 방랑자를 가리켜 ‘보헤미안’이라 불렀다. 반대로 계산과 실리에 밝은 속물근성을 가리키는 용어 ‘필리스틴’(Philistine)과 대조되는 표현이었다. 예술가나 배우, 작가, 음악인들, 그리고 지식인을 가리키는 대명사이기도 하였다.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공연 포스터./사진=위키피디아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La Bohème)은 바로 그런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가난한 예술가들과 돈 없는 젊은이들이 주로 살고 있는 1830년대 파리 라탱 지역이 무대다. 뒷골목 다락방에서 살고 있는 시인과 철학자, 음악가 등 보헤미안 기질을 가진 4명의 방랑생활과 우정, 사랑을 줄거리로 한 푸치니의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다.

보헤미안은 자유로운 영혼이 강조되는 예술계에서는 멋진 개념이었지만, 기업이나 국가차원에서는 관습이나 규율을 무시하는 반(反) 사회적인 사람들, 공상가이며 비현실적인 부류라 여겨졌다. 히피, 배가본드의 동의어처럼 쓰였다. 사회적인 부적응자들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던 ‘보헤미안’을 성공한 지식인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코드로 격상시켜 준 사람이 데이비드 브룩스였다. 지금은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을 결합한 ‘보보스’(BOBOS)란 새로운 혼성문화 개념을 들고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 책표지./사진=위키피디아
이 시대의 성공은 자유로운 영혼과 더 이상 따로 놀지 않으며, 반기득권적 태도와 기업가적 태도가 어떻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설명하였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창조적 파괴’ 같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 보헤미안이 부정적 에너지가 아니고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성공을 하였어도 지나치게 속물적이지 않고, 사치스러운 물질주의를 경멸하며, 반(反) 지성적인 분위기와도 거리를 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말한다. 이 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의 덕목이 점차 바뀌어 가고 있는 시대적 배경이다.

즉 근면함, 절약, 신뢰 같은 덕목들이 지금까지 리더들에게 요구되었다면, 지금은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지 보여주려 한다. 마치 예언자처럼 원대한 포부를 보여줘야 하는 시대다. 조직문제 전문가인 존 실리 브라운이 경영전문지 ‘포천’에서 한 말이 이를 대변한다.

"오늘날 리더십의 역할은 단지 돈을 버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의미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한명의 예술가처럼 일을 할 때, 마치 보헤미안처럼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허용될 때 일은 평생직업이 되고 천직이 된다고 데이비드 브룩스는 말한다. 미국에서 벌어지던 풍경은 지금 우리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정신적 영역과 시장의 영역이 혼합된 세상이다. 요즘 신입사원들은 재미가 없으면 사표를 낸다. 자기계발과 일의 성취감이 우선이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권위가 있는 직업이란 많은 수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술가처럼 자기표현을 잘 하는 직업을 의미한다. 보헤미안처럼 자유롭고 열린 정신을 열망하며, 창조적 에너지를 흡수하고 싶어 한다. 보헤미안 리더십이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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